'22 슨른 교류회 뎀슨 편
연성2022. 2. 8. 21:03#트리거워닝 : 자해, 자살시도, 공황 묘사
#헤드캐논이 다수 섞여 있습니다. (라자러스 핏 영향 등)
로빈은 망토를 휘날리며 건물 옥상 사이를 이동했다. 알고 있는 모든 안전가옥을 찾아가 구석구석 뒤졌지만,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린 제이슨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로빈은 평소처럼 레드후드와 크라임 앨리의 주도권을 두고 옥신각신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레드후드와의 연락이 끊겼다. 여러 차례 무선 통신을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기에 그의 행방을 알아보던 중, 도시 곳곳에서 난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태를 수습하며 원인을 파악하다가 스케어크로우의 공포 가스가 유출되어 공기를 통해 한순간 도시에 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기존에 만들어둔 해독제가 효과가 있어서, 사상자가 많이 나오기 전에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도시의 치안은 정상적으로 복구되었지만, 여전히 레드후드 통신은 꺼진 상태였다.
“-로빈.”
“-순찰중이예요, 아버지.”
“-그만하고 케이브로 복귀해라.”
통신 너머 들리는 브루스의 목소리엔 예민함이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가봤자 다들 신경이 곤두선 채라 불편하기만 할 거 같았다. 어차피 실시간 GPS 추적을 하고 있어 위치 확보를 했을 테니 복귀하지 않고 케이브 반대 방향으로 계속 이동했다. 하여튼 이 가족은 토드랑 관련된 일에 너무 과민 반응을 한다. 왜 그러는지 이해를 아예 못하는 건 아니지만은. 데미안은 주위 소음에 집중하며 도시를 돌아다녔다. 공포독소에 맞았으면 닥치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올 것이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도 늦었고, 더 이상 찾아갈 안전 가옥도 없다. 케이브로 돌아가기 전에 진짜 마지막으로 이곳을 둘러보고 돌아가야겠다. 데미안이 있는 곳은 팀이 개인 통신으로 보내준 제이슨의 또 다른 안전가옥이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곳은 제이슨이 머물렀다 나갔는지 주위가 너저분했다. 침실 선반 아래서 망가진 헬멧을 찾았다. 화장실에서 부서진 통신기도 발견했다. 현장에 남은 물건들로 보아하니 멀리 가진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근처에 혼자 오들오들 떨고 있을 거란 확신이 느껴졌다. 안전가옥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데 어느 마당 구석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한 남성이 땅을 파고 안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과 옷이 푹 젖은 걸 보니 비를 맞은지 한참이나 지난 거 같은데 미동도 없이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시체를 저렇게 세워놨나? 정신이상자? 아니면….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토드?”
“…….”
“야! 내 말 안 들려? 토드!”
맨땅을 파고 들어가 있는 사람은 제이슨이었다. 손톱 끝에 흙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주변에 흙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제이슨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고 동그랗게 땅이 파여 있는걸 보니 공포독소 때문에 이성을 잃어 흙더미를 파헤치고 이곳에 들어와 넋을 놓은 듯 했다. 데미안이 제이슨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어깨를 건드리고, 머리를 툭툭 치고, 제이슨이 싫어하는 말로 시비를 걸었지만, 제이슨은 반응 하나 없이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야! 정신 차려!”
“…….”
“안 되겠군, 나이트윙에게 도와달라 해야겠어.”
통신을 키고 상황설명과 함께 현재 위치를 좌표로 전송하려고 하는데, 굳어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제이슨의 고개가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흐리멍덩한 눈을 보고 순간 뒷걸음질 쳤다. 저체온으로 창백해진 피부, 생기가 없는 눈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왕자님.”
“뭐?”
조금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제이슨은 아랍어로 데미안을 왕자님이라 불렀다. 제이슨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데미안은 잠시 제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제이슨을 살펴보던 중, 다른 사람을 호출하려던 걸 그만뒀다.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린 후 제이슨을 케이브로 데려가는 게 가장 좋지만 그러면 도착 전에 제이슨이 저체온증으로 죽을 것 같았다. 공포독소를 해독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집까지 데려가는 게 문제지. 해독제 한 개가 데미안의 주머니에 들어있으니 일단 어떻게든 제이슨을 실내로 데려가기로 했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근육이 굳어 무거울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제이슨은 데미안이 움직이는 대로 인형마냥 얌전히 움직였다. 제이슨의 손은 비를 너무 오래 맞은 탓에 상당히 차가웠다. 안전가옥이 바로 옆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두 사람의 덩치 차이 때문에 데미안이 제이슨을 안고 데려가진 못하겠고,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 넣어서 바닥에 끌리게 했다. 옷이 진흙으로 더러워지겠지만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기엔 여유가 얼마 없었다. 데미안은 제이슨을 질질 끌며 안으로 데려갔다.
제이슨의 몸이 너무 차가워서 일단 체온을 올리려고 욕조로 끌고 갔다. 축축하게 젖은 옷들을 전부 벗겨내고 온수를 틀었다. 처음 온도조절을 잘못해 뜨거운 물이 쏟아졌는데 제이슨은 그저 묵묵히 물을 맞았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손을 잡고 체온을 확인했다. 뜨거운 물에 담궈 놨더니 몸이 점차 덥혀지면서 체온이 점점 올랐다. 혹시 모를 불안감에 손목 맥박을 확인했다. 확실히 정상적으로 뛰고 있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몸을 닦아주고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제이슨에게 옷을 입혀주면서, 데미안은 인형 옷을 갈아입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제이슨의 몸에 남아 있는 부검 흉터. 라자러스 핏은 모든 상처를 회복시켜주지만, 가끔 짓궂게 굴기도 한다. 이용자의 약점을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물건.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우둘투둘한 흉터를 손으로 매만졌다.
“형?”
데미안은 오랜만에 고향의 언어로 아주 작게 제이슨을 불렀다. 데미안은 제이슨을 어떤 방식으로던 알굴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데미안이 기억하기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제이슨의 반응은 어쩐지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신생아를 돌보던 유모가 몇 있었지만 그 중 한 명이 제이슨일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는 모습을 보고 이어서 옷을 입히려는데, 제이슨이 고개를 찬찬히 들었다. 눈은 여전히 흐릿했다. 제이슨은 상대를 확인하는 듯 천천히 눈을 굴리다가, 데미안인 걸 인지하고 눈을 감고서 몸을 데미안 쪽으로 기댔다. 데미안은 한동안 같은 자세로 굳어있었다. 제이슨이 반응할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데미안이 모르는 사이에 정말 알굴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걸까? 그러면 왜 기억 못하는 거지? 무언가의 호기심이 꿈틀거렸지만 꾹 억누르고, 제이슨의 팔에 해독제를 꽂았다. 이제 한시름 좀 놔도 될거 같아서 케이브로 통신을 연결했다.
“-토드 찾았어.”
“-뭐? 제이슨은 어때? 괜찮아?”
“-방금 해독제를 놨으니 금방 정신 차릴걸.”
“-세상에, 다행이다. 나도 거기로 갈게.”
“-뭐? 그럴 필요 없어.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그래도 걱정되니까.”
데미안은 소파에서 무릎을 모은 채로 앉아 있는 제이슨을 확인했다. 어째서 그가 아랍어로 자신을 왕자님이라 칭했는지, 아랍어로 불렀을 때 왜 반응했는지 알고 싶었다. 제이슨이 케이브로 돌아가거나 옆에 다른 사람이 생기면 물어보기 어려워질 것 같았다. 나중에 물어보자니 지금까지 데미안을 대하는 제이슨의 태도로 보아서 알굴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거 같지 않아 보였다. 물어볼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됐어, 나도 피곤하니 여기 있다가 케이브로 돌아갈게.”
“-…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알겠지?”
“tt.”
말은 그렇게 했으나 기어코 이곳에 나타날 나이트윙인걸 알고 있다. 그래도 피곤한 건 사실이다. 먼저 유니폼을 갈아입어 잘 준비를 한 다음에 제이슨의 반응을 이끌어 봐야겠다.
데미안은 옷장에서 자신이 입을 만한 옷을 뒤졌다. 상의는 그래도 얼추 입을 만 한데, 하의가 도저히 맞는 게 없었다. 하긴 이곳에 15살의 옷이 있다는 게 더 소름 끼친다. 옷더미를 몇 번 더 헤집은 끝에 그나마 덜 헐렁헐렁한 파자마 바지를 찾아 입었다. 바지단은 접어올리고 허리는 고무줄로 최대한 팽팽하게 조였다. 방을 나서기 전에 거울 앞에 섰다. 품이 조금 우스워보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삼 제이슨과 덩치가 얼마나 나는지 눈으로 새기게 되었다. 뭐, 상관없다. 데미안은 배트맨의 적자로서 브루스보다도 더 성장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옷 정리는 이쯤하고, 제이슨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문을 벌컥 열었는데 앞에 제이슨이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멍한 표정을 보아하니 완전히 해독된 건 아니다. 지금 한 번 말을 걸어볼까.
“제이슨? 여기서 뭐해?”
“…….”
제이슨은 데미안을 내려다보더니 팔을 들어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까지 천천히 걸었다. 데미안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서 일단 제이슨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제 말을 듣고 반응한 건 아니고, 무슨 환각을 보고 있나 보다. 침대에 올라가서 데미안을 눕히고 제이슨은 옆에 엎드렸다. 그리고 데미안의 배에 손을 대고 규칙적으로 토닥이기 시작했다.
‘이건…신생아 재우는 것도 아니고…. 역시 유모였나?’ 데미안은 뭐라 웅얼거리는 제이슨을 보며 남자 보모가 있었는지 떠올렸다. 가장 측근인 만큼, 여러 위험을 대비하여 탈리아는 보모 선정에 있어 굉장히 엄격한 심사 기준을 적용했다.
데미안은 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을 전부 기억했다. 그래, 남자 유모는 몇 있었는데 그중에 제이슨을 닮은 사람은 없었다. 라자러스의 녹색이 섞인 청록빛 눈동자, 짙은 이목구비에서 풍겨져 나오는 처연미를 기억 못할 리가 없다. 도대체 뭘 놓쳤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알굴에서 데미안을 제외하고 왕자라 칭할 사람이 있던가? 실험작이었던 것이 몇 있긴 했다. 금방 죽어버렸거나, 데미안이 정리했다. 데미안을 닮은 클론들이 계속 생성되었지만 그들을 왕자라 인정하는 멍청이는 없었다. 데미안은 라스의 뒤를 이어 리그 오브 어쌔신을 거느리고 세계를 정복할 운명을 가진 자였다. 그보다 더 왕자에 걸맞은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 분명 제이슨은 데미안을 보고 왕자라 칭했으니까.
대체 두 사람은 어디서 만난 걸까. 탈리아에게 물어보면 뭔가 알지 않을까 싶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다시 침대로 눕혀졌다. 제이슨이 침대에서 떠나려는 데미안을 다시 눕힌 것이었다. 잘못 반응한 거겠지 싶어 무시하고 다시 상체를 일으켰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아예 데미안을 껴안고 놔주질 않았다.
“뭐야, 이거 놔! 토드!!”
“자장, 자장….”
제이슨의 발음이 꽤 정확해졌다. 그는 데미안의 등을 두드리며 데미안이 잠들 때까지 계속 재우려 들었다. 얼떨결에 제이슨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들게 된 자세가 되어 데미안은 계속 발버둥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피곤했는데 주위에서 자라고 보채니 어떻게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의 품은 너무나 포근했다. 뜨거운 샤워로 적절하게 달아오른 체온은 데미안의 긴장한 몸을 사르르 녹였고, 코끝에 닿는 체향은 어째선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가슴은 왜 이렇게 말랑한 거야?
데미안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제이슨의 얼굴을 확인했다. 무표정이었지만 그 속에 경계심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편안함이 엿보였다. 데미안이 알고 있던 제이슨은 정말 온데 간데없이 사라진 거 같다.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제이슨은 데미안에게 어색하기만 했다. 제이슨한테 알굴에 관해 물어봐야 하는데. 몇 번 더 아랍어로 말을 건넸으나 아까와 달리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답 안 할거면 이거 놓으라며 발버둥쳤지만, 괜히 데미안만 힘들 뿐이었다. 결국 데미안은 자포자기하고 제이슨의 자장가를 들으며 스르륵 잠들었다.
“헉.”
데미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이슨은 먼저 일어났는지 침대는 비어 있었다. 분명 제이슨에게 잡혀서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는데, 한 번도 깨지 않고 너무 잘 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자느라 굳은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여 풀어주고 여전히 아래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붙잡으며 침실에서 나왔다. 방을 나서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달달한 냄새에 홀려 부엌으로 곧장 돌진했다.
“데미안! 잘 잤어?”
“새 나라의 어린이가 일어나셨구만.”
“뭐야, 그레이슨.”
“제이 상태 확인할 겸 아침밥 얻어먹으러 왔지.”
“계속 멀뚱멀뚱 서 있을거야? 네 음식에 독 안 탔으니 냉큼 앉아.”
어제와 다르게 멀쩡한 몰골로 말하는 제이슨이 순간 적응이 안되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 대놓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슨이 뭘 꼬라보냐고 인상을 썼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언어 실력에 혀를 차고 딕 옆에 앉았다. 제이슨이 데미안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척 보기에도 굽기가 완벽한 팬케이크다. 팬케이크 위에 뿌려진 메이플 시럽과 부드러운 버터는 완성도를 높여준다.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완벽한 팬케이크가 있다면 바로 이게 아닐까?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콧소리가 나올 뻔 한 걸 참았다. 그러나 딕과 제이슨은 이미 알아차렸는지 옆에서 피식 웃어댔다. 제이슨은 어제부터 데미안을 여러 가지로 놀라게 만든다. 식탁 아래로 제이슨의 무릎을 걷어차고 다시 유유히 식사를 계속했다.
“커피? 주스?”
“커피.”
“응, 주스 마셔.”
제이슨은 기다렸다는 듯 데미안 앞에 주스잔을 내려놓았다. 노란색 오렌지 주스. 그 안에 알록달록한 빨대까지 꽂아주었다. 데미안은 주스잔을 노려보면 커피로 변할 것처럼 굴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이슨은 낄낄 웃었다.
“그래서 제이슨, 어제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데미안이 놀라 가지고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놀라지 않았어. 과장하지 마. 정신줄 놓고 아무나한테 가서 우리 비밀 신분 노출할까봐 그랬던거다.”
“데미안이 너 걱정했대.”
“그레이슨!”
제이슨은 피식 웃었다. 데미안은 여전히 제이슨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제이슨이 가족들에게 피해를 준 전적이 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별개로 아이의 행동에서 형제를 걱정하는 티가 팍팍 났다. 그걸 숨기려고 애쓰려는 모습이 참 애다웠다.
“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 했어. 나도 아침에 일어났더니 요 꼬맹이가 내 품에 있길래 얼마나 당황했는지.”
“당황은 무슨, 네가 어제 날…!!”
“널 뭐? 어쨌는데? 내가 침대에서 널 체중으로 눌러 죽이려고 했냐?”
“tt, 됐고 설명이나 해.”
제이슨은 자신이 공포 가스를 흡입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평소처럼 크라임 앨리를 순찰하고 있었는데, 골목길에서 한 아이가 뛰쳐나오며 레드 후드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아이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오랫동안 갖은 폭력에 시달린 듯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제이슨이 가장 혐오하는 아동 폭력 사건이었고, 그는 곧장 아이를 따라 어느 허름한 창고로 뛰어갔다. 창고 안에는 10명 남짓한 아이들이 붙잡혀 있었다. 주위에 적이 있나 없나 확인 후 바로 아이들을 구출하러 창고에 들어갔고 마지막 아이까지 안고 무사히 창고를 나왔는데 그 이후부터 기억이 끊겼다.
아마 모든 게 제이슨을 노린 게 아닌가 싶었다. 아이가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제이슨은 무언가에 당했던 상태인 거다. 데미안은 그런 일이 있었으면 통신 중에 주변 소리로 알아차렸을 텐데 그런 건 듣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어쨌거나 모종의 방법으로 제이슨에게 환영을 보여주며 공포독소가 있는 창고로 데려갔고, 그가 화물을 옮기면서 공포가스가 도시에 퍼진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포가스의 진원지는 크라임 앨리였고, 데미안이 바로 창고로 갔을 때 근처에 떠도는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집안 꼴이 말도 못할 정도로 난장판이던데, 내가 무슨 짓을 했지?”
“그건 나도 몰라. 내가 왔을 땐 이미 난리났었어.”
“널… 다치게 하진 않았냐?”
여기서 데미안은 제이슨이 아랍어로 아는 척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길 껴안고 재우려고 했던 걸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딕이 옆에 없었으면 이야기했을 텐데. 이럴 줄 알고 어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기에는 부가적으로 설명할 일도 있고 단둘이서 풀어나가고 싶어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아니. 난 그냥 땅바닥에 쓰러진 널 데리고 왔을 뿐이야.”
“그렇군. 어쨌든 신경 써줘서 고맙다. 덕분에 금방 회복했어.”
“해독되었지만 그래도 케이브로 와서 검사받아야 해, 제이.”
“알아서 한다고.”
“그럼 피만 뽑게 해줘.”
“헛소리 하지 말고 다 먹었으면 이만 썩 꺼져.”
딕의 끈질긴 설득 끝에 혈액샘플과 함께 케이브로 돌아왔다.
밤새 제이슨의 집에서 푹 잤지만 낯선 곳에서 잠들어서인지 약간의 피곤이 남아있다. 오늘은 외출 약속도 없고 이따 훈련 프로그램만 진행하면 되니 잠깐 눈 좀 붙이려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 잠이 안 온다.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이불을 제대로 덮고 오른쪽으로 누웠다가 왼쪽으로 누웠다가 눈을 감고 양 떼를 셌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거기다 자꾸 제이슨에 관한 생각이 났다.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직 낮이라 그런가보다 싶어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훈련을 시작할 시간이 아니라 타이투스를 데리고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타이투스와 산책하고, 딕과 훈련을 하고, 팀과 몇 번 싸운 후 브루스와 함께 패트롤까지 돌고 왔다. 정신을 제이슨의 안전가옥에 놓고 온 듯, 잊을만하면 그의 목소리가 맴돌아서 바깥 활동 중에 제대로 집중이 잘 안됐다. 온종일 다른 걸 신경쓰느라 평소보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이 정도라면 잠은 잘 오겠지. 그리고 데미안은 또 한 번 잠을 설쳤다. 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몸에 피로와 긴장이 누적되는데 그게 해소되질 않으니 패트롤에 지장이 갈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졌다. 브루스가 데미안에게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하라며 먼저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진심으로 걱정했지만 데미안 스스로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어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은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긴 한데, 정말 그게 원인일 거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이슨의 품에서 잠들고 난 이후부터 이렇게 되었으니 원인이 그에게 있을 듯한데 이걸 브루스한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쨌든 제이슨을 만나러 가긴 해야 했다. 망할 토드, 비오던 날 땅에 묻힐 것처럼 보이던 제이슨을 만나고 나서부터 되는 일이 없다. 데미안은 알프레드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 제이슨의 안전가옥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그의 안전가옥과 가까워질수록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바로 잠들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잠들기 직전에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묘한 거슬림 때문에 잘 수 없었다.
제이슨의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생활 흔적이 분명 존재했기에 여기 있었던 건 확실하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데미안은 거실이 잘 보이는 자리로 가 제이슨이 집에 돌아오길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집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졸음이 쏟아지는데 막상 잠은 오지 않으니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 레드후드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은 없으니 민간인으로 다니고 있을텐데, 이 한밤중에 도대체 어딜 싸돌아 다니는지 모르겠다. 데미안은 잠복을 그만두고 집 근처를 돌아다녔다. 제이슨을 보면 당장 그를 끌고 와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서 잠을 잘 생각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욕구가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은 어느 한 놀이터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잠옷 차림의 제이슨과 마주쳤다.
“토드!”
데미안이 큰 소리로 제이슨을 불렀지만, 제이슨은 듣지 못했는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반응 없는 뒷모습이 마치 공포 가스와 접촉한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모습과 닮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데미안은 서둘러 제이슨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토드, 여기서 뭐하고 있어?”
“…….”
“내 말 안 들려?”
“……시끄러.”
제이슨은 혼자 중얼거리고 맨발바닥으로 모래를 밟으며 놀이터로 나아갔다. 평소와 비슷한 반응이 있는 걸 보아하니 공포 가스 반응은 아닌 듯 했다. 눈을 뜨고 걸어 다니고 있는데 어째 걸음걸이가 휘청휘청 위태롭다. 반사신경도 한 박자 늦고, 주위 환경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몽유병인가?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을 보니 머릿속에서 어떤 사람이 생각날 듯 말 듯 흐릿하게 형태가 만들어졌다. 저렇게 바보같이 걷는 사람이 누가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역시 짐작 가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고담에서 이런 무방비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므로 제이슨의 팔을 붙잡고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데미….”
“왜 불러.”
“…싶어.”
“뭐라고?”
“햄버거… 먹고 싶어.”
“진짜 가지가지하는군. 햄버거 사줄테니까 이리 와.”
“응….”
덩치만 큰 미아를 데리고 집에 돌아가는 거 같다. 데미안은 그렇게 느꼈다. 아니면 대형견이라던가. 여기다 목줄만 채우면 딱 알맞을 거 같은데. 제이슨은 간혹가다 뭐라 뭐라 잠꼬대를 하며 걷다가 멈추기도 하고 가기 싫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기도 했다. 산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싫은 강아지를 어르고 달래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안전가옥으로 돌아가는 동안 계속 느껴졌다. 잠깐 방심한 사이에 제이슨이 다른 곳으로 갈까 봐 몇 번이고 뒤를 확인했다.
“제이슨, 내 형제.”
“……쿨.”
“야, 햄버거.”
“으…응? 햄버거….”
혹시 몰라 아랍어로 말을 걸었지만, 제이슨은 눈 뜬 채로 잠든 상태라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름 말고 햄버거에 반응하기나 하고 말이야.
제이슨은 침대에 눕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데미안은 사람이 한 명 웅크리고 잘 수 있을 정도로 남은 침대 공간을 바라보며 조금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진짜 제이슨 옆에서 잠을 자야 할까? 저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품에 잠든 거고, 이번에는 데미안의 의지로 여기까지 왔다. 그는 잠 못 들던 지난 밤을 떠올렸다. 그리고 챙겨온 잠옷으로 갈아입고 제이슨의 옆에 드러누웠다. 이게 효과가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함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사그라들었다.
데미안은 꿈을 꿨다. 알굴에 있을 때의 기억이었다. 이제 막 5살이 되었을까, 작은 아이는 본인보다 훨씬 크고 긴 장검을 들고 있었다. 무겁지도 않은지 검을 제 몸의 일부분처럼 다뤘다. 오늘도 지배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수련이 이어졌다. 성인이 따라가기도 벅찬 커리큘럼을 어린이가 곧잘 해내는 걸 보며 주위에서 감탄이 이어졌다. 역시 라스가 선택한 후계자답다, 탈리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이유가 있다며 칭찬 일색을 퍼부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훈련을 통해 남들보다 강하다고 하지면 결국 어린아이에 불과했기에 금방 한계가 찾아왔고, 선생들은 지쳐 쓰러진 아이를 내버려 두고 훈련실을 빠져 나갔다. 데미안은 새까만 어둠 속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일어나야 했지만, 몸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축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저 문은 데미안이 직접 열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열릴 일이 없다. 그게 알굴의 방식이니까.
그래야하는데, 굳게 닫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문이 조금씩 열렸다. 데미안은 눈앞에 들이닥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문 앞에 어떤 형체가 가만히 서 있었다. 보모는 아니었다. 탈리아는 데미안의 자립심을 위해 그가 쓰러져도 내버려 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어떤 고난을 겪어도 홀로 일어서길 바랐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암살자인가? 데미안의 눈에는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은 하얀 남자가 보였다.
붕대를 감은 남자. 어느 날 갑자기 탈리아가 데려온 의문의 소년. 그는 난다 파르밧의 훈련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하인처럼 거친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그냥 제자리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데미안은 그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라스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탈리아는 호기심을 갖지 말라고 질문을 잘라버렸다. 탈리아의 독단적인 행동인 듯 아예 그의 존재를 모르는 간부들도 존재했다. 너무나 이질적인 그의 존재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 없는 그에게 ‘움직이는 시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항상 가만히 앉아 있던 시체가 왜 여기에 왔을까? 그는 천천히 데미안에게 다가와 팔을 뻗어 그를 껴안았다. 정말 시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몸이 차가워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는 데미안을 안은 채 밖으로 나가 데미안의 침실로 이동했다. 주위에서 데미안을 감시하던 이들이 있었을 텐데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가는 내내 주위는 조용했다. 항상 밖에 있던 그가 위치는 어떻게 알았는지 작은 의문이 생겼다. 진짜 시체는 아니었나 보다. 대답을 듣지 못할 게 뻔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데미안은 그의 손길에 따라 침대에 눕혀졌다. 이대로 방을 나가려나 싶었는데 자기도 따라서 침대로 올라가려는지 느릿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데미안은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시체의 생김새를 자세히 살폈다. 다시 보니 상당히 가녀린 체구를 가졌다. 살은 없고 근육이 좀 있어 보이는데, 너무나 마른 근육이라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붕대 틈으로 보이는 피부는 푸르스름한 색깔을 띄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에서 여기저기 찢겨진 상처가 보였다. 그리고 유난히 파랗던 눈동자. 알굴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눈동자 색이었다.
침대에 올라와서 뭘 하려나 싶었는데, 그를 재우려 했던 모양이다. 어색한 손길로 데미안의 배를 두드렸다. 이렇게 신생아처럼 다뤄졌던 적이 없어서 데미안은 억지로 자는 척을 해서 그를 내쫓으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옆에 낯선 사람이 있으니 잠이 올 리 없다. 눈 감고 버티면 알아서 갈 줄 알았는데 데미안이 자고 있지 않은 걸 눈치챈 듯 계속해서 배를 두드리길래 결국 눈을 뜨고 시체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알아듣기를 바라면서.
“그만 해! 알아서 잘테니까.”
“……?”
그럼 그렇지. 데미안은 몇 번 더 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을 내뱉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다음 훈련 전까지 조금 자야겠다. 학습 능력이 없는 시체여도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겨우 잠들라던 찰나에, 별안간 시체가 저를 껴안길래 놀라서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뭐야? 이거 놔! 명령이야!”
시체는 아이를 껴안고 가만히 있었다. 나약해 보이는 겉모습에 비해서 어디서 나온건지 힘이 굉장히 셌다. 데미안도 온갖 근력 훈련을 해와 나름 근육이 있는 몸인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데미안은 지배자의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억지로 힘을 빼는 것보다 시체가 알아서 놔주도록 기다렸다. 시체는 데미안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다음 행동을 시작했다. 아까처럼 배를 두드리기. 다만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살살, 배가 아니라 등을 두드렸다. 누구한테 명령을 받은 모양인지 융통성 없이 데미안을 재우려 들었다.
“…왕자님.”
“뭐? 방금 뭐라고 했지?”
아주 가녀린, 끊어질 듯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일반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숨소리 같았다. 호흡기관이 망가져 겨우 숨소리만 내뱉는 그런 느낌. 데미안은 시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왕자님이라고? 이곳에서 그런 취급을 받긴 한다. 왕자보단 후계에 가깝지만.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데미안을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걸 이 녀석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정체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졸음이 몰려왔고, 눈을 한 번 깜박인다는 게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버렸다.
그 이후로 시체는 종종 데미안에게 다가와 그를 안고 재웠다. 훈련이 끝나면 문 앞에 그가 있었고, 데미안은 그의 품에 매달린 채로 방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그와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누가 뭘 바라고 이 녀석에서 그런 명령을 내린건지 그게 좀 신경 쓰였지만, 시체를 통해 데미안을 암살하려고 했던 거면 진작에 시도했을 텐데 이렇게 살아있는 걸 보니 크게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건 그렇고, 이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여러 차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시체의 갸우뚱거림이었다. 이렇게 몇몇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어쨌든 데미안과 함께 지낼 때 오로지 그에게 집중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시체는 여전히 데미안을 왕자님이라 불렀다. 점점 몸이 회복되어가는지 날이 가면 갈수록 목소리와 발음이 명확해졌다. 아무도 데미안을 그렇게 부르지 않으니 마치 애칭처럼 느껴졌다. 거기다 한 번은 데미안을 닮은 여러 클론 사이에서 고전하는 그를 보고 무작정 달려들어 클론을 쓰러뜨린 적도 있었다. 그런 행동은 처음이었다. 시체는 하얀 붕대가 붉게 물든 채로 데미안에게 다가와 데미안에게 무슨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때 확신했다. 이건 온전히 나를 신경 써주는 ‘내 것’이라고. 데미안은 피투성이 시체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너머로 아주 약하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조심스런 손길로 피가 묻은 붕대를 한 꺼풀씩 벗겨냈다. 새까만 머리카락, 푸르스름한 피부, 창백한 눈동자, 그리고 얼굴이 드러났다. 괴물같이 생겼을거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잘못된 착각이었다. 얼굴 주위의 지저분한 상처를 제외하면 굉장히 말끔하게 생겼다. 그리고 어렸다. 고작해야 15살 정도 되어 보였다. 그날은 붕대 없이, 소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그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이봐, 이름이 뭐야?”
“…….”
“널 계속 ‘시체’라고 부를 순 없잖아.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거야, 아니면 대답을 못하는 거야?”
“…B-.”
“데미안 님, 훈련 시간입니다.”
“잠깐만, 뭐라고? 못 들었어. 방금 뭐라 말했잖아.”
제이슨은 우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대답을 방해한 하인을 날카롭게 째려봤고 하인은 몸을 낮추고 방에서 서둘러 나갔다. 데미안이 계속 대답을 재촉했지만 제이슨은 입을 열 줄 몰랐다.
“흠, 새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좋겠지. 네가 날 왕자님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름보다 애칭에 가깝겠지만.”
“왕자님?”
“그래, 그렇게.”
그를 볼 때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진다. 탈리아를 보면 안정감이, 라스를 보면 경외심이 솟았다. 그들을 볼 때 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이건 좀 더 특별하다. 그러니 그에 걸맞는 이름을 정해줘야 한다.
“하비비(habibi). 이제부터 널 그렇게 부르겠어. 넌 내 거야.”
“…….”
시체와 사랑에 빠진 데미안 알굴. 데미안은 스스로 그 수식어가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주위에서 항상 보는 게 시체 더미와 살육의 현장이라 그런지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비비가 진짜 시체인 것도 아니고, 그저 비유에 불과했으니. 여차하면 기술자들을 닦달해 그를 치료할 수 있게 명령을 내려도 될 것이다. 붕대를 풀고 데미안의 이름을 부르는 하비비도 좋았지만 이렇게 수동적으로 데미안의 명령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는 하비비도 좋았다. 데미안은 그를 껴안았다. 시체 또한 아주 느리게 팔을 올려 데미안을 마주 안았다.
나중가서야 탈리아가 그에게 데미안을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탈리아에게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렸냐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때가 되면 알 것이라는 말과 함께 건네진 칼이었다. 데미안은 직접 답을 물어보고 싶어서 그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느새 홀연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추적할 수 없었다. 거기다 데미안에게는 지배자의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 이어졌고 여러 다사다난한 일을 겪으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무뎌짐에 따라 처음 느낀 소유욕의 열망도 점차 옅어졌다.
데미안은 새벽녘에 개운하게 눈을 떴다. 참으로 길고 그리운 꿈이었다. 알아보지 못한 게 당연했다. 지금의 제이슨과 그때의 움직이는 시체… 첫사랑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데미안이 좋아했던 파란 눈은 라자러스에 물들어 녹색이 섞였고, 어리숙했던 골격은 크게 자라 그때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공포 독소는 제이슨이 기억하지 못한 알굴의 기억을 되살렸다. 어쩌면 제이슨도 무의식적으로 데미안을 찾아 밤마다 돌아다닌 게 아닐까? 뭐가 되었던 데미안은 다시 찾은 ‘내 것’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잊고 있었던 소유욕을 떠올리니 옆에서 가만히 잠든 제이슨이 다시 보였다. 그렇게 비쩍 말랐던 몸이 이렇게 듬직하게 성장한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쩐지 가슴이 그렇게 푹신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일단 언어부터 고쳐야겠다. 맨날 ‘감자’라던지, ‘꼬맹이’라던지 낮잡아보는 별명을 부르는데 그런 별명 말고 다른 애칭을 지어줄 필요가 있었다. 경호 실력은 레드후드로서 활동하는 걸 아니 굳이 검증할 필욘 없다. 몸은 이미 준비가 다 끝났고, 정신적으로 교육만 좀 시키면 예전처럼 데미안 앞에서만 고분고분하게 구는 제이슨으로 다듬어줄 수 있을 듯 했다. 제이슨의 원래 위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친히 너그럽게 보살펴줘야겠다. 데미안은 만족스런 기분을 만끽하며 제이슨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는 시간이 많으니 그와 처음부터 함께 시작해야겠다.
알프레드는 텅 빈 침실을 보며 이걸 브루스에게 알려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자세한 까닭은 모르겠으나 최근 데미안이 제이슨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알굴에서 고담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경계심이 많이 풀어진 데미안이었으나 갈등을 여러 겪은 제이슨만큼은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지 쌀쌀맞게 대했다. 그런데 공포 독소 사태 이후로 밤 외출이 잦아졌다. 목적지는 전부 제이슨의 안전가옥이었다. 근데 이게 데미안의 일방적인 접근인지, 가족 식사 시간 때나 확인 할 수 있는 데미안과 제이슨의 관계는 큰 발전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뭔가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제이슨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뭔가 나쁜 쪽으로 진행되고 있진 않은 듯 하니 섣불리 건드리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집사의 노련한 감은 적중했다. 며칠 뒤 데미안이 별안간 제이슨과 사귄다고 충격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옆에 있던 제이슨은 당장 혀 깨물고 죽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데미안은 어릴 적 제이슨과 만난 걸 이야기하며, 그때부터 연인이었으므로 자신이 성인이 되면 바로 식을 올리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씨발, 말 안한다며!”
“내꺼라고 빨리 찜해놔야 한다고. 역시 뭘 모르는군.”
“야! 네가 얌전히 따라오면 더 이상 그 짜증나는 플러팅 안한대서 온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따라갔을거야! 빌어먹을….”
“음, 저기, 데미안이 무슨 짓을 했길래…?”
“닥쳐,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제이슨은 며칠 동안 데미안이 교육이랍시고 달라붙던 일을 떠올렸다. 자다 깨니 데미안이 옆에 있길래 놀랐는데 그가 한 말은 더 가관이었다. 머릿속에 담아두고 싶지 않아서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데 대충 ‘내 반려가 되라’ 이런 뉘앙스였다. 지금까지 옥신각신 싸우던 사이에 뭐? 반려? 제이슨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자 데미안은 우리는 알굴에서 만났고, 거기서 네가 이런 일을 했고, 난 옆에서 이랬고 어쩌구 저쩌구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솔직히 전부 흘려들었다. 데미안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뀐 게 제일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며 앞으로 책임을 다하겠다는데 제이슨 입장에서는 그저 한참이나 어린 꼬맹이가 뭘 모르고 주절거리기에 불과했다. 네가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넘겼더니 직진밖에 모르는 꼬맹이가 불도저처럼 일상에 난입해 온갖 골치를 겪었다. 하도 진절머리를 내니까 데미안이 그럼 한 번만 같이 저택에 들리자고 말해서 왔는데, 이런 사고를 낼 줄 몰랐다.
며칠 전부터 데미안 또래의 어린 아이들이 눈에 밟히긴 했는데 그게 이런 의미였나? 정말로 데미안과 과거에 무슨 연이 있었나? 데미안이 옆에서 세뇌하듯 이야기를 꺼내니 이성이 그에 수긍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데미안을 껴안고 자면 묘하게 안정이 되긴 했다.
탈리아와 만나기 전의 기억들과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다. 라자러스 핏에 빠지기 전의 일들. 알굴에서 한동안 몸을 담고 있었던 건 맞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로 데미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근 들어 악몽도 잘 안 꾸잖아. 아니야! 데미안이 원하는 대로 하면 안된다고, 진짜. 이럴 순 없는데….’
제이슨은 데미안을 노려봤고, 데미안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슨을 바라봤다. 그 미소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점점 마음이 데미안 쪽으로 기우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정말 많이 놀랐지만, 이쯤 되니 데미안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게 맞는 거 같다. 제이슨은 팔을 움직여 데미안의 손을 잡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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