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반뎀슨/ 서큐버스 제이슨

연성2024. 4. 2. 16:43
감정을 먹는 서큐버스 au

 

 

 제이슨은 맹세코 배트맨과 엮일 생각이 없었다.

 배트맨에게 손댄 사람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박쥐와 빌런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고담이니 이곳에 산다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신체접촉도 없이, 몹시 굶주렸다. 그가 그저 평범한 인간 아이였다면 진작에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소매치기짓을 하면서 얻은 찰나의 가벼운 접촉만이 제이슨의 얇디 얇은 명줄을 겨우 연명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얄팍한 술수도 잠시, 주린 배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해 전신의 온기가 점점 사그라들던 때였다. 제이슨은 사색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대로 가단 정말 아사(餓死)뿐이었다. 욕조에서 싸늘하게 죽어가던 캐서린을 떠올리자마자 팔에서 소름이 오도도 솟아났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주저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배트맨에게 손을 뻗다가... 또다시 망설였다. '이렇게 고민하는 1분 1초 조차 사치인데...' 제이슨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배트맨에게서 풍겨나오는 공포의 냄새는 구미가 썩 당겨오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무작정 몸에 집어넣고 단순한 허기를 채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아보였다. 일단 배를 채우려면 피부와 접촉해야하는데, 배트맨은 빌어먹을 하관을 제외하면 온몸을 꽁꽁 감싼 상태였다. 당연히 카울을 벗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섣불리 손댔다가 폭탄이라도 터지면 어떡해?

 보통 이런 경우에는... 그러니까.... 제이슨은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아, 키스. 키스를 하면서 감정을 먹어치우는게 가장 좋은데 이 또한 당연하게도 제이슨은 배트맨과 절대 키스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노출되어 있는 턱을 매만져야 할거같았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 이런 상태가 된걸까?'

 

 벽에 기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리분별을 못하는 박쥐라니. 바로 옆에 있는 제이슨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면 무슨 약물에 제대로 당한 것 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여기저기 망가지고 손상된 갑주들이 보였다. 제이슨은 날카로운 갑주 파편에 다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움직였다.

 

 '이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을까?'

 

 그래도 그가 있는 골목이 크라임앨리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구역이라 운이 좋았다. 제이슨이 살고 있는 16번지는 박쥐와 빌런의 싸움으로 한참 전에 곳곳이 무너져 방치된 곳이었다. 최근들어 재개발의 조짐이 보이긴 하나 여전히 페허나 다름없는 곳이라 거주민은 거의 없지만 대신 숨을 곳이 많아 제이슨처럼 길거리생쥐나 부랑자들이 애용하던 장소였다. 혹여나 제이슨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를 발견했더라면... 크라임앨리가 좋지 않은 일로 한바탕 폭풍에 휩싸였을 게 분명했다.

 

 "당신을 발견한 게 나라서 진짜 다행인 줄 알아. 나한테 빚진거야, 배트맨."

 

 제이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배트맨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어쨌거나 턱을 만져야하는데, 그러려면 제이슨이 배트맨의 품에 안긴 자세여야 편해보일 듯 싶었다. 선 채로 앉아 있는 배트맨의 턱을 만지는 건 어쩐지 자세가 좀 요상하니까. 파고들 틈을 만드려고 팔을 들어올리자 배트맨은 잠깐 움찔할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슈트가 무거운건지, 근육으로 꽉꽉 들어찬 팔이 무거운건지, 둘 다인지, 아니면 제이슨이 지금 힘이 없는건지 팔 한짝 옮기기에도 너무 힘들어서 한참을 끙끙거렸다. 그동안 더더욱 배고파졌다.

 겨우겨우 배트맨의 양 팔을 움직여 안에 안길 수 있을 공간을 확보했다. 슈트에 달린 이상한 장치를 누르지 않게 묵중하게 자세를 잡은 후, 배트맨의 턱을 맨손으로 챱 잡았다. 면도를 열심히 하는지 턱이 나름 맨들맨들했다. 배트맨도 슈트 만들면서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설마 서큐버스가 자기 턱을 만지면서 감정을 먹어치울거라고 생각하겠어.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이슨은 아주 배부르게 감정을 먹어치웠다. 몇 개월만에 느껴보는 포만감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진 공포의 감정이라 맛이 좀 형편없긴 했지만, 예상대로 허기가 금새 채워졌다. 조금 과식을 한 거 같기도 했다. 제이슨은 포동포동해진 배를 통통 두드렸다. 이대로 배트맨을 내버려두고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제이슨은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실수를 범했다.

 보통 서큐버스들은 감정을 먹을 때 상대방의 허락을 받는다. 신체 접촉때문이기도 하지만, 감정이란 게 사실 기억과 경험, 그리고 생각에서 파생된 거라 필연적으로 타인의 기억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추억이라 할지라도 그건 서큐버스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제이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배트맨의 감정을 먹는 만큼 잔류된 상념을 거르고 걸러 최대한 온전한 감정 자체만 먹으려했지만 막상 한 입 먹고나니 그런 걸 신경쓸 수가 없었다. 남들 눈치 안보고 먹고 싶은대로 잔뜩 먹을 수 있던 적이 살면서 몇 없었다. 굶주림과 초조함은 제이슨을 채찍질했고, 허겁지겁 감정을 먹어치웠다. 감정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마다 공포를 기반으로 한 기억들이 하나 둘씩 공유되었다. 그렇게 제이슨은 방심한 채로 입 안에 남은 잡을 되새기며 입맛을 다시다가... 문득 배트맨이 '데미안 웨인'이라는 걸 깨달아버렸다.

 

 "잠시만, '웨인'?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웨인?"

 

 이런 미친. 애초에 제이슨이 고민하던 이유도 이거였다. 배트맨의 감정을 먹는다면 뭘 보던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만다. 배트맨이 제 정체를 알아버린 제이슨을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고담시민이라면, 특히 크라임앨리 주민이라면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웨인사의 복지 지원을 받아봤을 정도로 웨인은 아주 유명했다. 제이슨 또한 (비록 하청업체에서 비리가 터지긴 했으나) 웨인 복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의식주를 제공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는 잠시 전광판에 찍힌 데미안 웨인의 자본주의적 미소와 배트맨의 일그러진 미소를 떠올리곤 둘을 비교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리 해봐도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배트맨의 감정을 먹은 걸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제이슨은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같은 공포여도 웨인같은 부자가 만든 공포여서 그런지 맛이 더 좋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뭔가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감정의 스펙트럼이 깊고 넓어져서 그런 듯 싶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감정을 편하게 먹은 적이 손에 꼽다보니, 이래저래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배가 부르니 금새 행복해지고, 사람이 느긋해졌다. 잠시 포만감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데미안 웨인=배트맨 공식이 떠올라 금방 정신차리고 얼른 배트맨이 깨기 전에 서둘러 도망치려고 했는데, 진짜 믿을 수 없게도, 배트맨이 먼저 일어나 양 팔로 제이슨을 가뒀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할거야, 꼬마야."

 

 맨날 텔레비전으로 듣던 '웨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분명 감미로운 목소리인데 어째 이리 싸늘하고 무서운걸까. '난 이제 진짜 망했다.' 제이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팀은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맨날 뭔 시정잡배들이나 줘패고, 말 안통하는 조커나 투페이스랑 소득없는 말싸움이나 하고 다니고, 끝없이 밀려오는 웨인엔터 업무처리만 해서 매일 반복되는 야근이 지겨워 사표를 내버리려던 참에 갑자기 나타난 메타휴먼의 존재는 팀의 지루한 일상과 축 쳐진 기분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원래 고담은 메타휴먼 금지지만, 말 잘 듣는 메타휴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더군다나 외부에서 들어온 메타휴먼이 아닌, 고담태생 메타휴먼이라니 얼마나 탐구할 거리가 많을지! 물론 그에 따른 뒷처리가 생겨서 조금 이따 카울을 뒤집어쓰고 데미안 대신 순찰하러 나가야 했다. 팀은 조금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고 제이슨에게 다가갔다.

 

 제이슨은 하얀 종이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손 쓸 틈도 없이 배트맨한테 곧장 납치당했다. 순식간에 골목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배트모빌에 태워져서, 안전벨트도 착실히 채우고, 엄청난 속도로 고담 밤거리를 질주해 동굴에 도착했다. 배트맨의 본거지, 배트케이브는 데미안 웨인의 머릿속에서 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기억은 주관적인거니까 좀 더 살갑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삭막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그대로여서 살짝 놀랐다.

 

 "자, 긴장하지 말고, 편히 있어. 쉬면서 문답지를 작성해주면 돼. 쓰는 동안 간식이라도 좀 먹을래? 아, 서큐버스는 그런 거 안먹는다고 그랬던가?"

 "아, 아냐. 먹어."

 "그래, 난 저기에 있을테니까 편하게 있어. 다 쓰면 부르고."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쥐들이 가득한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집사의 안내를 받아 새 옷으로 갈아입고, 팀 웨인의 설명과 함께 맛있는 간식거리를 먹으며 서큐버스의 삶에 대해서 답을 적어내렸다.

 팀이 제이슨 앞에서 아이덴티티를 숨기지 않은 건 일부러인 듯 했다. 이미 제이슨은 이들의 정체를 다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와서 구태 생색낼 필요가 없다는 뜻일 터였다. 확실히 데미안 웨인이 배트맨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레드로빈 복장을 입고 있던 팀을 봤을 때 크게 놀라진 않았다. 팀 또한 아까 동굴로 복귀하면서 데미안이 무전으로 전한 내용을 들어서인지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웨인 엔터프라이즈 COO 팀 웨인을 가까이서 보니까 조금 신기해서,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팀과 시선이 마주치면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은 해독을 위해 집사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크라임앨리 골목길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사람치곤 언행이 멀쩡해보였는데 아직 체내에 뭐가 남아있을거고, 혹시 모를 위협이 있을지 모르니 정밀검사를 해야한다며 순식간에 가버렸다.

 

 문답지 내용은 특별하진 않았다. 이름이 뭔지, 서큐버스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친인척이 있는지, 알고 있는 다른 서큐버스가 있는지 등등,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써내려갈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엄청 부드럽고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열심히 적어내리다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동굴에 도착한 시점부터 이미 자신의 인적사항을 다 알아차렸을 거 같은데, 기어코 이렇게 쓰라고 한 거는 정보 교차 확인을 위해서일까? 라는 추측. 예전에 어떤 갱단원들의 대화에서 듣기론 박쥐들이 엄청난 편집증 환자라고 하던데... 과연 배트맨 가족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하지 않나 싶었다.

 

 "다 썼어, 그.. 레드로빈?"

 "편하게 팀이라고 불러. 자, 너도 데미안을 오염시킨 물질에 중독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혈액 검사를 좀 해봐야겠거든? 팔 좀 내밀어줄래?"

 "바, 바늘은 싫은데."

 

 제이슨은 팔을 움츠렸다. 바늘은 싫었다. 캐서린이 주사바늘을 이용해 마약을 복용하고 있었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어떤 연유든 바늘을 보면 불쾌감이 모든 감정을 압도했다. 하지만 팀은 제이슨이 주사를 싫어하는 게 단지 아프고 따가워서 그런 런거라 여겨 아프지 않게 잘 해주겠다고 타일러댔다.

 

 "미안, 꼭 해야하거든. 대신 내 팔을 꼭 붙잡고 있어도 괜찮아. 필요하다면 내 감정을 먹어도 되고. 저 호문쿨루스보단 맛있을 걸? 아, 혹시 감정 먹으면서 피로회복이나 기억삭제도 해주니?"

 "...뭐라는거야, 서큐버스는 피로회복제가 아니라고."

 "글쎄? 네 주변에는 다른 서큐버스가 없었어. 어쩌면 너조차도 모르는 능력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

 

 팀의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제이슨은 실소를 흘렸다. 너무 어이없는 발언이지만 박쥐들이라면 그런 거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넘어갈 뻔 했다. 당당하게  그럴 리가 없다고 반론하려던 때에, 갑자기 팔에서 날카로운 감각을 느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옆에 집사가 와서 팔에 주삿바늘을 찌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제이슨은 팔을 부여잡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며 팀과 집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하하, 진짜 미안해. 답례로 내 감정을 먹게 해줄게. 마음껏 먹어도 괜찮아. 나도 서큐버스가 어떻게 섭취하는지 실제로 보고 싶었거든."

"흥..."

 

 제이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휙 돌렸다. 더 이상 응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어른과 달리 어린애는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몸으로 다 알려줘서 알아차리기 참 좋았다. 하고픈 말도 명료하고 간단해서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할지도 명확했다. 이럴땐 그냥 멋쩍은 웃음을 짓고 제이슨이 작성한 종이와 혈액샘플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자리를 비켜주는 게 가장 좋았다.

 제이슨의 혈액샘플에서는 특이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 DNA 구조가 다르다던가, 어떤 특수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렇진 않아서 의외였다. 설문지 내용과 배트케이브로 찾아낸 정보에도 오류가 없었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웨인 복지 프로그램을 이수하다가 중간에 탈주했다 정도일까. 마 건의 집. 팀은 보육원 이름에 강조 표시를 해두었다. 저 부분 관련해서는 나중에 물어볼 필요가 있어보였다. 어쩌면 다른 서큐버스에 대해 알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제이슨에 대한 분석은 끝났고, 문제는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순찰 도중 스케어크로우의 신종 공포 가스를 맞았다. 이대로 케이브로 돌아와서 해독제를 맞았으면 해결될 간단한 사안이었지만, 깜찍한 서큐버스의 개입이 난점이었다. 공포가스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포를 서큐버스가 저녁뷔페로 맛있게 먹어버렸다. 어차피 해독 과정도 공포가스의 영향으로 생긴 공포심을 없애는거니 서큐버스의 저녁식사 시간도 해독의 과정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뭐가 꼬였는지 공포가스는 사라졌는데, 이상한 부작용이 생겨버렸다. 팀은 모니터에서 이리저리 요동치는 그래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원격으로 데미안을 진찰하던 레슬리 또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다음에 '서큐버스'와 함께 클리닉에 오기를 권고했다.

 

 "데미안, 기분이 어때?"

 "평소랑 다를 건 없는데.... 드레이크, 도대체 뭐가 문제지?"

 "네 경우는 '감정폭발'이랑 비슷해. 레슬리 박사도 간헐적 폭발장애와 비슷하다고 진단내렸어. 안에 쌓인 감정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 이성을 잃고 감정을 전부 쏟아낼 때까지 광인이 되어버리지. 다만 분노에 치중된 폭발장애와 다르게, 넌 분노, 우울, 기쁨, 종류는 상관없이 일정 리미터 이상을 넘으면 폭발해버릴거야."

 "고칠 방법은?"

 "없어. 평생 항정신성 약물을 복용하던지, 아니면 저 서큐버스한테 매일매일 감정을 먹어달라 해야지."

 

 데미안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팀을 노려봤다. 평범한 사람들이면 데미안이 정색하며 쳐다보는 걸 보고 몸을 사릴테지만 이미 몇 년동안 함께 합을 맞춰오며 치고 박고 싸운 팀이었다. 지금 데미안은 처음 만났을 때 목숨을 위협받았던 거에 비하면 그냥 가볍게 흘려봐도 좋았다. 그러니 데미안의 시선은 가볍게 무시하고, 그의 몸에 붙은 의료기기를 철썩철썩 떼어냈다.

 

 "어차피 갈 곳 없는 꼬마잖아. 생김새도 브루스가 좋아할 흑발벽안인데, 괜찮아보여. 우리 정체도 다 알고. 브루스의 메타휴먼금지 정책엔 어긋나긴 하겠네. 컴퓨터에 업로드된 내용을 보고 전화로 잔소리하겠지만 어차피 리그 사업때문에 몇 개월은 안 올 테니 적당히 상대하고 그동안은 우리가 데리고 있는게 낫겠어."

 "짜증나는군."

 "괜히 저 어린애한테 화풀이하지 마. 쟤가 뭘 알고 저랬겠어?"

 "닥쳐, 드레이크. 나도 그 정돈 구별할 줄 알아."

 

 데미안은 악몽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즈음, 한 꼬마가 주변에서 계속 어슬렁어슬렁 거리던 걸 기억했다. 그러곤 뭐라더라? '나한테 빚진거야' 라고 중얼거렸던가. 빚지긴 무슨, 데미안 웨인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지 매기기조차 어려울텐데 태평하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신체검사가 끝나 옷을 갈아입는 내내 알 수 없는 감각에 압도당해 기분이 축 쳐졌다. 난데없는 서큐버스의 등장으로 자신의 앞날이 불안해졌다. 상대가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했을텐데 정말 단순히 살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가 행동한 거라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배트맨을 보고 당돌하게 돌진하는 모습을 보면 기개가 넘친다고 칭찬해줘야 할 판이었다.

 팀은 벌써 패트롤을 돌러 갔는지, 동굴에는 제이슨 혼자였다. 바닥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를 동당거리며 쿠키를 먹고 있었다. 데미안이 제이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니 아이의 표정에 살짝 굳어가는 게 보였다. 따지고 보면 당한 사람은 저인데, 왜 제이슨이 더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짓는건지 그 부분에 마음이 상해서 데미안도 정색을 하고서 제이슨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대충 들었겠지."

 "음... 앞으로 여기에 감금당해서 평생 감시당하며 산다는 거 정도."

 "뭐? 우리를 도대체 뭐라 생각하고 있는 거지? 우린 네게 그렇게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어."

 "그럼 집에 보내주던가!"

 "갈 데도 없는 길거리 쥐잖아."

 "...야, 날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거야? 너희의 정체를 떠벌릴거라 생각해서 이러는거야?"

 

 제이슨은 당장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도망칠 것 처럼 보였다. 그렇지않아도 방금 팀에게 감정조절을 잘 해보라고 놀림 아닌 놀림을 받아서 기분이 좋지 않은데, 원인 제공자가 저렇게 경계해대니 갑자기 속에서 뭔가 열불이 확 올라왔다. 무슨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감정조절을 못하는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몹시 꼴불견이었다. 일순 몸을 가눌 수 없도록 강렬한 저림이 느껴졌고, 콘센트를 콱 뽑아버린 것 마냥 눈앞이 까맣게 점멸됐다.

 

 정말 이상한 순간이었다. 데미안 웨인의 감정이 일순간 엄청 응축되었다가 펑 폭발해버렸다. 제이슨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데미안을 겨우 피하고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안에서 뭔가 엄청 심각한 이야기를 하던데, 설마 자신이 배트맨의 감정을 먹었을 때 무슨 부작용이 생겨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증폭하는 현상같은 걸까?'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배트맨은 정말로 너무너무 무서웠다. 심지어 슈트를 입지 않고 편한 티셔츠를 걸치고 있는데도 진짜 무서웠다.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제길, 레드로빈은 어디로 간거야? 이봐, 웨인! 정신차려!"

 

 등 뒤로 딱딱한 벽이 느껴졌다. 앞에는 미친 데미안 웨인이, 뒤에는 물러설 곳이 없는 막다른 벽. 제이슨은 머리를 팽팽히 돌렸다. 그냥 제이슨 토드는 못하지만 서큐버스라면 어떻게 정면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점점 제이슨에게 다가왔다. 지금 뭔가 엄청 화나있는데, 저 감정을 먹어치우면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데미안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때, 아래로 수그려 빈틈을 만들고 품 안으로 쏘옥 들어간다면 얼추 접촉이 가능해보였다. 목덜미랑 팔이 훤히 드러나는 반팔티를 입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성을 잃은 데미안의 공격은 굉장히 빠르고 난폭했지만 단지 눈 앞의 무언가를 부셔버릴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쓸데없이 큼지막했다. 제이슨은 데미안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다가 최적의 때에 몸을 움직여 데미안의 품에 들어갔고, 재빨리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섭취를 시작했다. 이번 기억은 방금 전, 의무실에서 팀과 데미안이 나누던 대화였다. 

 감정을 먹어치우기 시작하니 데미안은 금새 얌전해졌다. 제이슨을 꽉 껴안은 채로,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수그리던 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제이슨의 위에 데미안이 드러누운 자세가 되어버렸다. 데미안의 육중한 몸무게가 제이슨을 짓눌렀다. 그렇게 데미안에게 압사당할 위기에 처한 제이슨은, 때마침 돌아온 집사한테 발견되어 무사히 구출되었다.


 제이슨은 팔에 기브스를 한 채로, 거대한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브루스 웨인의 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여전히 카울을 쓰고 있어서 정확히는 배트맨 모드지만. 뒤에는 슈퍼맨, 원더우먼 등 아주 가끔 텔레비전에서나 봤던 저스티스 리그의 영웅들이 화면에 잡혔다 사라졌다.

 

 "그렇게 되었어요, 브루스. 데미안은 이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고, 제이슨은 기폭장치예요. 감시카메라 영상을 봐서 알겠지만, 무술 경험이 없는데도 데미안의 주먹을 피한 기본적인 재능은 있는 친구예요. 비록 몸이 허약해서 뼈가좀 부러졌지만. 어때요? 당장 자경단원으로 들인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제 앞가림을 할 순 있도록 우리가 임시보호해주는 거죠. 언론에 보낼 문구는 다 생각해뒀어요."

 "본인의 의사는 물어본거니? 이름이.. 제이슨 토드?"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조금 안심이었다. 이상한 실험을 한답시고 감금고문이나 할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까 잘하면 학교도 보내주고, 나중에 원하면 독립도 시켜줄 모양새였다. 브루스는 제이슨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살짝 쉬었다. 이미 알아서 다 준비가 끝난 거 같은데, 여기서 안된다 해도 말을 안 들어먹는 녀석들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너희들의 판단에 맡기마. 이만, 배트맨 아웃."

 

 화면이 명멸되고, 고요한 침묵 속에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웨인을 보조하고 있던 집사, 알프레드였다.

 

 "그럼 제이슨 도련님, 앞으로 묵으실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 저,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제가 모실 분이니 응당 도련님이라 불러야지요."

 "아... 음, 그리고 난 미스터 웨인이랑 같이 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항상 붙어 다녀야하는 걸로 아는데."

 

 팀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아, 하고 힘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보니 앞으로 몇 년은 같이 살아야할텐데 정식으로 제대로 된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상황설명도 다시 해줘야할 듯 싶었고. 길거리에서 눈치만 보고 살던 애라 그런지 굉장히 위축되어 있고, 세 사람의 얼굴과 몸짓을 엄청 신경쓰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게 거리에서 살아남은 능력이겠지.

 

 "난 팀 드레이크-웨인이고, 저놈은 데미안 알굴-웨인. 미스터 웨인이라 부르지 말고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줘. 그리고 너랑 데미안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거니까 네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음, 우리가 요청하면 와서 감정을 먹어주고 가끔 같이 건강검진하러 가는 정도일거야. 그냥 편하게 '웨인 후원 홈스테이 프로그램'의 참여자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리고 얜 원래 성격이 안좋으니까 그러려니 해."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마, 드레이크."

 "이것 봐라. 얘가 이러는 것도 익숙해질거야."

 "TV에 나올때는 완벽한 귀공자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얘가? 그거 다~ 대본 써준거 읽은거야. 출연 안하고 싶다고 얼마나 짜증을 내던지."

 "드레이크!"

 "뭐, 내가 말 잘못한 거 있어?"

 "제이슨 도련님, 이쪽입니다."

 

 제이슨은 두 사람을 뒤로 하고, 집사를 따라 어두컴컴한 동굴을 지나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따듯한 조명으로 가득한 저택으로 올라갔다. 잡지에서나 보던 값비싼 물건들, 고급스런 인테리어를 보니 괜히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계단도 많고, 방은 또 얼마나 많은지, 무수히 많은 방문을 지나친 끝에 집사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기가 제이슨 도련님의 방입니다. 안에 욕실도 구비되어 있고, 기본적인 생필품이 다 갖춰져 있으나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불러주세요. 아, 옆 방은 데미안 도련님의 방이니 물어볼 게 있다면 물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으음, 고마워요, 집사님."

 

 제이슨은 어색하게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무슨 제이슨이 가족들과 살던 집보다 훨씬 크고 깨끗했다. 제이슨같은 애가 5명이 누워도 널널할 거 같은 거대한 침대, 깨끗하게 다려진 옷들, 프라이빗한 개인 욕실에는 또 욕조까지 있었다. 제이슨은 어색하게 침대 끄트머리에 살포시 앉았다. 배트맨 감정을 먹고, 죽을뻔한 위기에 처하고, 이제는 의식주 제공까지. 이게 다 하룻밤만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참 믿기 어려웠다. 자고 일어나면 이게 다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렇게 그날은 거의 선잠을 잤던 것 같다.

 그리고 제이슨은 굉장히 묘한 꿈을 꿨다. 상황을 보면 꽤 먼 미래의 모습처럼 보였다. 제이슨의 무의식적인 희망사항이라도 반영되었는지, 데미안이나 제이슨 둘 다 지금보다 훨씬 성숙해보이는 모습에다가 지금보다는 좀 더 친밀해보였다. 오늘처럼 데미안에게 안겨서 그의 감정을 나눠먹고 있는데, 데미안의 생각이 읽혔다. 엄청 낯간지럽고 달달한 내용이었다. 마치, 데미안이 제이슨에게 사랑이라도 느끼는 것 마냥....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감정의 여파가 오래 남았다. 제이슨은 침대에 파고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침 해가 얼굴을 간지럽힐 때까지, 심장이 진정될동안 한참 여운을 음미했다.-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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