슨른/ 30분 동안 집중하기
연성2024. 2. 6. 16:5830분동안 집중해서 뭐라도 쓰기
슨른 기반 헤드캐논 다수

제이슨을 껴안았을 때 가장 먼저 다정함이 느껴졌다. 반항적이고 거친 모습 이면에는 따뜻하고, 듬직하고, 부드러운 감정들이 가득했다. 어린애들은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내곤 하지. 그래서 그렇게 애들과 서슴없이 잘 지냈던 건가. 그동안 패트롤을 함께하며 보았던 여러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데미안이 제이슨 토드를 가장 감정적이라고 표현한 건 한치의 과장도 없었다. 지금처럼 그저 포옹을 했을 뿐인데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잔뜩 흘러나오고 있잖아. 아주 잠시동안, 데미안은 오랜만에 리그에 있을 적 함께 지냈던 보모가 그리워졌다.
라자루스 섬으로 돌아가는 동안에 이따금씩 레드후드의 널찍한 등과 얇은 허리가 생각났다.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허리가 얄팍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져보니 더더욱 그랬다. 나중에 성인이 되서 다시 한 번 그 허리를 잡을 때는 한 손으로도 감쌀 수 있을 것 같았다. 왼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제이슨의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그대로 뭐할건데?
데미안은 혼자 화들짝 놀랐다. 어째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거지? 맹세컨데 제이슨 토드를 그런 시선으로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의 맨 몸을 봐도 가슴이 좀 크고, 허리가 얇따랗다는 감상뿐이었다. 혼자 감상에 젖어서 축축해진 청록빛 시선과 마주쳐도, 훈련 중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봐도,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데미안은 자꾸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레드후드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폭탄을 피해 이리저리 내달리며, 틈이 보일 때마다 자신을 추적해오는 이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총구에서 불꽃이 튈 때마다 습격자들이 중심을 잃고 뒤로 고꾸라졌다. 달리고, 쏘고, 피하고, 쏘고, 쏘고. 마지막으로 건물 옥상 위에서 핸드캐논을 발사하는 미치광이를 처리하고 나서야 겨우 숨돌릴 수 있었다. 그래도 안도하지 않고 습격 위치에서 몇 키로나 더 떨어진 곳까지 도망쳤고, 근처에 잠복이 없나 몇 번의 확인을 거친 후에야 헬멧을 벗고 땀으로 축축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악당들에게 습격당했으니 이제 본거지로 돌아가 적이 누군지 파악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누구의 짓인지 너무나 명백했다.
"좆같은 데미안 웨인."
데미안 웨인이 레드후드에게 현상금 5억 달러를 걸었다. 레드후드를 생포에서 고담으로 데려올 것. 이유는 단순했다. 제이슨이 저택에 오질 않으니까. 크게 부상을 입었을 때도 케이브로 안 가고 자신의 안전가옥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제이슨인데, 데미안이 공개 프로포즈까지 한 뒤에는 아예 고담을 떠나버렸다. 다들 데미안이 곧장 제이슨을 추적해서 강제라도 혼인식을 올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데미안은 표정 변화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는 제이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이슨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대로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데미안도 꽤 여린 감수성을 지녔기에 이 일로 상처받을까봐 딕이 얼른 다가가서 그를 달래주려 했는데, 그 당시를 회상하던 딕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뒤돌아서 방으로 올라가는 데미안은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물론 데미안은 당연히 제이슨이 고백을 거절할거라 생각했다. 제이슨 성격에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도망칠 게 뻔했다. 받아줬다면 그거대로 혹시 클레이페이스가 변장한 게 아닌지 의심부터 했을테다. 고담에서 도망친 제이슨을 찾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냥 찾아서 억지로 데려오면 오히려 반발심이 들고 다시 도망치는 과정에서 다른 놈과 눈이 맞을 수 있으니 (말했잖아, 한창 그 나이대의 감수성이 있다니까. 딕이 중얼거렸다.) 테니 제이슨이 스스로 저택에 발을 들일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알프레드의 눈물 호소나 브루스의 감시보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 저택에 오고 싶지 않아도 결국 저택에 올 수 밖에 없도록. 데미안은 제 통장 잔고를 확인했고, 바로 전세계 현상금 헌터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도 제이슨을 쫓을 만반의 준비를 했다. 명색의 레드후드의 (미래)남편인데 다른 녀석에게 놓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현재, 데미안은 기진맥진해 있는 제이슨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반지케이스를 들고.
제이슨이 기어코 우리에서 탈출했다. 몇 겹으로 감싼 자물쇠가 형편없이 망가져 있고, 두꺼운 철제 사슬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맛있는 밥도 주고, 심심하지 않게 놀아주고, 아낌없이 애정을 퍼부어주며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게 뼈를 부러뜨리고 보안을 강화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그를 놔두고 가버렸다. 물과 식사는 줄어든 기미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보금자리에 남아 있는 온기를 봐서는 도망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딕은 올빼미 가면을 챙기고,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질질 끌린 발자국과 핏자국을 따라 느긋하게 밖으로 나아갔다. 먹잇감을 추격하는 건 올빼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탈론의 작고 소중한 생쥐는 옛날부터 술래잡기를 좋아했다. 길거리 생활을 전전하다가 저택 생활에 적응하고 나서부터는 넓고 거대한 저택에서 쉴새없이 뛰어다니며 식사준비하는 집사를 놀래키고, 간부들과 화상회의중인 보호자 방을 덜컥 열어젖히고, 마지막엔 형에게 와서 그 잘난 서커스 기술을 보여달라며 귀찮게 주위를 굴곤 했다. 딕은 동생과 놀기보단 또래 친구와 수다떠는 게 더 좋았기 때문에 매번 시비를 무시했다. 그럼 제이슨은 형의 물건을 들고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어릴 때부터 험악한 환경에 홀로 노출되었기에 어떻게든 비밀 은신처를 만드는 노하우가 있던 제이슨은 매번 상상을 초월하는 장소에 숨었다. 몸집이 유달리 작아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 숨을 수 있던 점도 한몫했다. 알프레드도 브루스도 쩔쩔매며 제이슨을 찾아다녔는데 이상하게 딕은 제이슨이 숨은 곳을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다. 제이슨의 안전 가옥을 가장 먼저 찾아내고, 비밀 신분을 제일 빨리 알아차리고, 제이슨의 심경 변화도 곧바로 눈치챘고. 그러니 이번에도 제이슨이 지루해하기 전에 돌봐줬어야했는데 일이 바빠 그러지 못했다. 생쥐를 다시 데려오면 다른 건 생각도 못하게 사랑을 줘야지.
"형이랑 술래잡기 하고싶었구나, 리틀윙. 그래도 그렇지,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나가면 어떡한담. 거기다 여긴 크라임앨리나 저택과 다르게 숨을 곳이 없을텐데... 뭐, 어디 한번 찾아볼까."
딕과 제이슨의 스윗홈 너머에는 올빼미 법정이 만든 거대한 미로가 있었다. 탈론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유독 가스가 퍼져 있어 한번 들이마시면 몸이 마비되면서 끔찍한 환상이 정신을 압도한다. 그러니 얼마 못가 쓰러진 제이슨을 발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장면이지만 아쉽게도 제이슨의 몸엔 라자러스의 기운이 퍼져 있어 남들보다 내성이 강했다. 라자러스 때문에 탈론 수술이 통하지 않아 여러모로 고민이 많던 차였다. 이번 기회에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레드후드의 전력이라면 법정도 흔쾌히 탈론 양성에 찬성할 테다.
안으로 점점 들어갈수록 벽에 날카로운 손톱 자국과 새빨간 혈흔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니 술래잡기도 금방 끝이 날 듯 했다. 저 멀리 한 남자가 벽을 짚고 절뚝거리는 걸 발견했다. 역시 제이슨은 꽤 날카로운 시선을 가졌다. 제이슨이 있는 위치는 미로의 벽과 벽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었다. 미로가 순환할 때, 잘하면 탈론의 추적을 피해 전혀 다른 미로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추적을 피하는 것과 미로에서 탈출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미로 구역이 바뀌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 그전에 생쥐를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딕은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가 발톱으로 먹잇감을 움켜쥐듯 제이슨을 거세게 껴안았다.
"잡았다. 제이."
"윽..., 씨발, 이거 놔!"
"산책은 이제 끝이야. 그만 돌아가자."
딕은 무리하게 자물쇠를 부수려다 망가진 제이슨의 손 끝을 일부러 세게 거쥐었다. 겨우 아물어가고 있던 상처가 터져 뜨거운 피가 흘러나와 차갑디 차가운 딕의 피부에 떨어졌다. 제이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렀지만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딕 얼굴도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앞만을 보았다. 왼쪽 다리는 딕이 부셨고, 다른 한 쪽도 멍 투성이라 성치 않은데 그걸 굳이 끌고 나왔다. 양 손은 피투성이었고, 피부는 독성 가스의 영향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제이, 나 좀 봐."
"...가야해, 얼른 나가야 하는데-"
"...."
제이슨은 제 옆에 있는 사람이 딕 그레이슨-한때 형이라 여겼고, 든든한 동료이자 애인으로 생각했던 남자라고 죽어도 믿지 않고, 죽은 애인의 시체를 뒤집어쓴 괴물이라고 믿었다. 저 샛노란 눈동자의 가짜가 딕을 죽였어. 스스로 탈론이라고 말하던 가짜 딕은 언젠가의 캐서린 토드처럼 차갑게 굳은 존재였다. 언제부터 이 이상한 놈한테 붙잡혀서 감금당해있었는지 기억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 미로의 끝에서 딕이, 다른 가족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거라는 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배트팸이 와서 구해주러 올 텐데, 그러니 그 전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올빼미 둥지를 벗어나야 하는데, 자꾸만 눈 앞이 흐릿해져만 갔다.
딕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제이슨을 안고 뒤돌아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티모시 잭슨 드레이크. 올빼미 법정은 네게 사형을 선고한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해도 팀과 제이슨의 첫 데이트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족스럽게 마무리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올빼미 가면을 쓴 암살자가 나타나 행복하게 데이트를 하던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탈론은 날카로운 단도를 팀의 얼굴에 들이댔다. 갑작스런 위기상황에 머리가 새하얗게 텅 비고,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다. 암살자에게 지목당한 팀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둘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기랄, 제이슨은 주먹을 꾹 쥐었다.
전공 수업에서 처음 만나 얼굴을 익히고, 조별 과제 팀원으로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은 게 3개월 전, 조별과제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주 만났는데 대화할 때마다 서로에게 너무 잘맞아서 그대로 단짝 친구가 된 게 2개월 전, 그리고 약간의 삽질 끝에 감정을 확인하고 연인관계까지 발전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첫 만남부터 죽이 잘 맞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사랑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조별과제도 완벽하게 넘기고 고된 기말고사를 마치고서 방학을 맞이해 잊을 수 없는 첫 데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여러가지 의미로 충격적인 데이트가 되버렸다.
"젠장, 팀, 도망쳐!"
"어, 어떻게! 넌 어쩌고!"
"난 신경쓰지말고 얼른 가!"
"저 괴물이 노리는 건 나야! 제이슨, 얼른 가서 도움을 요청해!"
제이슨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팀은 품에 가지고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탈론에게 뿌렸고, 탈론의 시야가 잠시 멈춘 사이에 뒤돌아 재빠르게 골목길로 도망쳤다. 탈론은 말한대로 팀만 신경쓰는 듯 제이슨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곧장 팀이 도망친 골목길을 쫓아 사라졌다.
"젠장." 제이슨은 일단 경찰신고부터 하고, 근처에 심어놓은 안전가옥 위치를 확인한 후 그쪽으로 향했다. 신고는 했다만 경찰만 전적으로 믿을 순 없었다. 레드후드 장비를 챙겨 탈론을 따라잡기 전까지 부디 팀이 살아있길 바랐다. 적어도 시체라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탈론이 어째서 팀을 노렸을까? 올빼미법정이 추측하기로 팀이, 드레이크 가문이 법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을까? 드레이크 가문은 고고학으로 명예와 약간의 부를 가진 평범한 귀족 가문이었다. 배트맨의 정보로도 알아낼 수 없는, 법정만이 알아차린 특별한 뭔가가 있었을까. 물론 그런 거창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냥 단순히 눈에 거슬러서 처리하려고 한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제이슨이 레드후드라는 걸 알아차리고 근처 인물을 처리하려는 속셈일지도. 제이슨은 팀에게 붙여놓은 추적기를 보며 서둘러 GPS 좌표로 이동했다.
다행스럽게도 팀은 살아있었다. 옷이 넝마가 되고 이마와 왼쪽 팔에서 피가 철철 흐르지만 살아있었다. 탈론은 어디로 갔지? 레드후드는 주변에 잠복중인 탈론이 없는지 재빨리 확인한 후, 재킷에서 붕대와 소독약을 꺼내 서둘러 팀의 부상을 치료했다. 탈론뿐만 아니라 이 골목에 사람이 없다는 점이 조금 의아했지만 금방 잊혀졌다. 팀은 낯선 인기척에 겨우 눈을 떴다.
"레드.. 레드후드..?"
"그래,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곧 구급차가 올거니까 조금만 기다-"
"뒤에..."
세상이 까맣게 점멸하기 전에, 팀이 살짝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았다.
-
팀은 발 밑에서 혈청이 부족해 바르작거리고 있는 탈론을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달만 해도 벌써 3번째 암살시도였다. 법정의 실질적 1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팀을 제거하기 위한 배신자들의 발톱이 나날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요즘 제이슨과 핑크빛 연애를 해보겠다고 이쪽에 신경을 못썼더니 그걸 기회로 보고 감히 덤비려 들었다. 사교클럽 인원도 한번 물갈이를 싹 해야하는데...
팀은 책상을 똑, 똑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제이슨 토드-레드후드 관련 자료를 훑었다. 서류 안에는 팀과 함께 찍은 사진, 제이슨의 학생증 사진, 그외 팀이 몰래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제이슨이 너무나 귀여워 저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말았다. 제이슨이 들어오기 전까지 대청소를 해놔야겠다. 제이슨한테는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으니까. 탈론에게 청소를 해놓으라 지시해놓고, 수업시간에 맞춰 건물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이슨과의 첫 데이트였다.
제이슨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주변에 잠복한 탈론에게서 허가받지 않은 탈론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정말 대담하다. 민간인 신분에서 덮치려고 하다니. 그렇지만 이건 오히려 팀에게 기회였다. 정적도 해치우고, 제이슨도 데리고 오고. 원래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겠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팀은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여태까지 민간인 팀 드레이크 행세를 하며 참아온 게 대단한거지. 팀은 제이슨을 위해 남겨놓은 새하얀 올빼미가면을 보며 미소지었다.
브루스는 딕 이후로 제이슨을 키우면서 여러가지 당혹스런 일을 많이 겪었기에,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고 부모-멘토로서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배트맨한테 호기롭게 쇠지렛대를 휘둘렀을 때도, 크라임앨리에서 궁핍하게 자랐던 탓에 한밤중에 은식기들을 훔쳐 달아나려했을 때도, 알프레드가 만든 받은 쿠키를 한 번 맛보고서 너무 감동했던 탓인지 영원히 보관하겠다며 침대에 숨겨놨다가 개미가 꼬여서 난리났을때도, 첫 순찰이 끝나고 난 후 너무 들뜬 나머지 잠이 안온다고 저택을 온종일 돌아다녔을 때도 몸으로 익힌 육아 방법으로 상황을 정리했던 그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로빈, 그건..."
"배트맨! 나 강아지 키울래요!"
"어디서 데려온거니?"
"저쪽 골목길에서요. 주인한테 버려졌나봐요, 계속 낑낑거리면서 절 쫓아다니더라고요. 이렇게 귀여운 애를 어떤 몹쓸 놈이 버렸을까!"
제이슨이 안아들고 있는 동물이 강아지가 아니라 늑대라고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미노로 얼굴이 가려져있지만 저 한껏 들뜬 목소리, 내려갈 줄을 모르는 입꼬리 등 워낙 감정이 잘 드러나는 아이라서 더더욱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이 늑대는 어디서 온 거지? 고담 역사 문헌에 늑대가 종종 나오기 때문에 아예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옛날이고 현대의 토종 고담 늑대는 전부 멸종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늑대를 키우는 건 둘째치고, 일단 데려가서 유전자검사를 통해 어디서 굴러들어온 종인지 알아봐야겠다. 배트맨은 조용히 배트모빌에 올라탔고, 로빈은 아기늑대를 껴안고 뒤뚱거리며 모빌에 올라탔다.
-
8살 팀 드레이크는 늑대인간이다. 고담에서 유일하게 혈통이 이어져내려오는 늑대인간 가문, 드레이크 가의 후손. 하지만 이렇게나 문명화된 현대에서 늑대인간이라는 설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잭과 자넷은 팀에게 항상 늑대인 걸 숨기라고 말했고, 팀도 딱히 늑대의 힘을 이용해서 뭘 더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담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란색 망토를 보기 전까지.
팀의 부모님은 고고학 발굴작업때문에 저택에서 지내는 나날이 짧았고, 자연스레 팀은 바깥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원래는 그냥 멀리서 사진만 찍으며 로빈을 지켜봤는데, 점점 멀리서 흐릿하게 찍은 사진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고도의 훈련을 받은 로빈의 이동경로를 일반인 팀이 따라가기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위험한 고담 밤거리에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날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달려가는 것도 겨우겨우 하는데 그 간격을 좁히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가아끔 로빈한테 들켜서 집으로 안내받는 이벤트가 있어 그때를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그거는 운이 좋아야 가능했고 또 대놓고 옆에서 바라볼 수가 없어서 마냥 좋지만도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동안 작은 머리로 심도있는 고민을 한 끝에... 팀은 카메라를 버리고 로빈의 선명한 모습을 두 눈에 담기로 했다.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늑대로서. 늑대라면 달리기 속도도 빠르고 힘도 있고 외형도 귀여우니 로빈의 속도를 따라갈 수 도 있었고 들키더라도 그냥 강아지인 척 하면 되니까 문제없었다!
그런데 이런 전개는 예상조차 못했는데. 로빈한테 입양되는 팀 드레이크라니. 이러면 배트케이브도 실제로 가볼 수 있고, 잘하면 로빈과 배트맨의 실제 신분도 알아낼 수 있는 거잖아! 너무 좋아서 로빈의 얼굴을 핥으려다가 참았다. 진정해!! 지금 팀 드레이크는 강아지로 위장한 늑대야. 너무 좋아서 본질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그렇지만, 로빈의 볼이 너무 부드러워보이는데 한 번만... 안 돼! 한 번만.... 딱 한 번만.. 참아! 그럼 손은 핥아도 될까? 그건... 안 돼!! 팀은 로빈에게 안겨 케이브로 이동하는 내내 자기 자신과 힘겹게 싸워야했다.
-
제이슨은 로빈 복장을 갈아입고, 옆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얌전히 기다리는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새까만 털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강아지는 제이슨의 쓰다듬을 받으며, 가끔 제이슨의 볼을 핥으며 재빠르게 케이브 내부를 둘러보았다. 로빈은 역시 생각했던 대로 2번째로 활동 중인 제이슨 토드였다. 그럼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고, 여긴 웨인 저택 지하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드레이크 저택과 웨인 저택은 숲 하나를 경계로 둔 이웃집 사이이니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제이슨한테 다가가서 친밀도를 쌓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경외하는 로빈의 일상 모습을 볼 수 있단 사실에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이렇게 귀여운 널 방치한 부모를 찾아 한 대 걷어차줄거야, 강아지야."
팀은 그 말을 듣고 열심히 외국에서 땅을 파고 있을 부모님을 떠올렸다. 1년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 그래도 가정부가 있으니 아예 방치하는 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네 이름을 뭐로 할지 곰곰히 생각했어. 넌 앞으로 로빈의 파트너가 될거니까 으음.. 로빈-독이야! 어때! 알프레드한테 말해서 네 유니폼 만들어달라할게!" 강아지의 꼬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거 입고 사진 찍으면 평생 가보로 간직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제이슨, 네 '로빈 독'과 함께 이리 좀 와보렴." 브루스의 우중충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제이슨은 강아지를 데리고 거대한 배트 모니터 앞에 섰다. 모니터에는 DNA 확인 결과 - 팀 드레이크, 늑대 유전자 89% 일치 라는 창이 띄워져 있었다.
"배트모빌에 떨어진 털을 분석해봤단다. 네가 데려온 강아지는 사실 늑대인데, 그냥 늑대도 아니고 늑대인간이야. 이제 그만 본모습으로 돌아오지 그러니? 알프레드가 옷을 준비해놨단다."
"무, 무슨 소리야! 그럴리가 없는데! 내, 내 로빈 독...."
제이슨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팀을 내려다보았다. 팀은 컹.. 하고 망설이는 듯 하다 결국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제이슨보다 한참이나 작은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슨은 팀 드레이크를 알고있었다. 옆집 드레이크 가에 살고 있는 꼬맹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순찰을 돌 때마다 자신이 위험한 건 생각도 안하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 당돌한 꼬맹이. 걔가 늑대-인간이라고? 늑대를 처음 봤을 뿐더러, 제이슨의 눈에 들어온 이 작은 짐승은 너무나 귀여웠다.. 상황을 알고나니 팀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깜찍한 짓을 벌였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제이슨, 진짜 널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네가, 네가 너무 좋아서.. 가까이서 더 보고싶어서.. 그랬어...진짜 맹세코 배트맨과 로빈 정체를 캐내려고 그런 게 아니라!" 어느새 팀도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진정해, 팀.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둘 다 아직 한참 어린애라는 걸 깨달은 브루스가 뒤늦게 아이 둘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애들의 감정은 순식간에 바뀌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었다.
"너.. 내가 좋은 게 아니라 로빈을 좋아한 거 아니야?" 제이슨의 말에 팀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첫번째 로빈, 딕도 좋지만...(딕을 알고있다고? 제이슨이 살짝 경악했다.) 악에 맞서 용감하게 주먹을 내지르고 사람을 구하는 네가 더 좋아!"
"... 날 속인 거 용서해줄테니까 한 번만 더 늑대로 변해줄 수 있어?" 팀은 머뭇거리다가 늑대꼬리와 늑대 귀만 내보였다. 제이슨은 새까맣고 부드러운 늑대 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큰 결심을 한 듯 팀에게 통보했다.
"우리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얌전히 보낼 수는 없지.. 내일 오후까지 나랑 놀아야 해, 팀 드레이크! 알프레드의 간식을 먹으면 정신 못차릴 걸!!" 제이슨은 히히 웃으며 팀의 손을 붙잡고 저택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이끌었고, 팀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제이슨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울먹거리던 건 언제고 어느새 하하호호 웃으며 친해진 두 아이를 보며, 브루스는 제이슨에게 좋은 친구가 생겼다며 안심했다. 나중에 그 좋은 친구가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팀 드레이크는 하얀색이 잘 어울리는 뱀소년이었다. 피에 젖은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채, 반란군에게 쫓겨 죽기살기로 달아났던 아이, 우연찮게 근처를 지나가던 제이슨에게 발견되어 근처 보급기지에서 아이보리색 티셔츠를 입었던 아이, 로드에게 부모를 잃어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반란군에 가입하고 싶어했고, 결국 반란군 수장 브루스에게 그 의지를 인정받아 제이슨과 함께 지내게 된 정찰대원.
제이슨이 토끼수인으로서 재빠르게 로드의 군대들을 정찰해 와 대략적인 규모와 주요 기지 내용을 가져오면, 작고 새까맣던 뱀수인이었던 팀은 그 체격을 이용해 로드의 눈을 피해 더 자세한 데이터를 가져오고 추적기를 설치하는 등 방해공작을 펼쳤다. 그가 챙겨온 데이터들은 반란군이 로드의 발목을 끊을 수 있었던 성공요인이었다. 임무가 끝났을 때마다 제이슨이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팀의 얼굴이 기쁨인지 부끄러움인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곤 했다.
매번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서 질리지 않고 놀리는 맛이 있던 그 순진무구한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사복으로 하얀 옷을 고집했다. 제이슨은 팀이 흰옷만 고집하는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다.
"이봐, 팀보. 왜 맨날 하얀 옷만 입는거야? 다들 하얀색은 빌어쳐먹을 로드가 생각난다며 기피하는데."
"음... 나도 그렇긴 한데, 내가 뱀으로 변하면 너무 새까매서 다들 잘 못 알아보더라고. 내가 밟혀 죽는것보단 그냥 하얀 옷을 입는 게 더 낫지."
"그러면 내가 옮겨줄까? 네가 뱀으로 변해서 내 머리 위에 올라가 있거나, 아니면 내 팔을 칭칭 감고 있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정말 놀란 게 있다면, 토끼의 기동력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거야."
"떨어질까봐 무서워? 에이, 내 품에서 잘 보살펴줄게."
제이슨은 두 팔을 넓게 벌렸고, 팀은 주춤거리다가 이내 뿅! 하고 뱀으로 변신해 제이슨의 가슴으로 돌진했다. 제이슨의 손바닥만한 크기로 줄어든 팀은 똬리를 틀고서 뱀 특유의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제이슨을 올려다보았고, 제이슨은 팀을 가슴에 소중히 품고서 반란군 본부로 복귀했다. 항상 에너지가 흘러넘쳐 기초체온이 높은 토끼랑 다르게, 뱀은 굉장히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워서 낮게 가라앉은 체온을 제 체온으로 채워주고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제이슨의 품에 안긴 팀은 뜨듯한 체온 덕분인지, 아니면 정찰임무 이후 긴장이 풀려 피곤이 몰려왔는지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확실히 팀의 비늘은 굉장히 칠흑빛이라 조명 아래가 아니었다면 못보고 지나칠 정도였다. 그래, 팀 드레이크는 하얀색이 잘 어울리는 검은 뱀이었다.
그래서 반란군 정찰대원인 제이슨 토드가 로드 특유의 하얀 망토, 제복을 입은 팀 드레이크에게 잡혔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들이 있었기에 그런 거였을까.
오늘 팀은 몸이 아파서 정기 순찰에서 빠졌다. 원래 혼자 고담을 자기네 앞마당처럼 돌아다녔던 제이슨은 팀의 부재에도 개의치않고 홀로 토끼답게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로드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특이점이 없나 주변을 살피며 평소처럼 기지로 복귀했다.
암호를 풀고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로드군에게 붙잡힌 동료들과 기지 한 가운데에 놓여진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고고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던 레드로빈이었다. 로드 슈퍼맨이 특히 총애한다는, 특출난 두뇌를 가진 레드로빈. 제이슨이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나가기 전에, 옆에 있던 로드군에게 붙잡혀 레드로빈 앞에 강제로 무릎을 꿇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들어 팀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제이슨을 붙잡은 군인이 그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서 그러지도 못했다.
"기다렸어, 제이슨. 마지막 외출은 즐거웠지? 앞으로 집토끼가 되면 오늘처럼 산책못할테니까 일부러 좀 봐줬어."
"뭐, 씨발, 이게 다 뭐야, 팀 드레이크!!"
"원래는 이들을 다 죽이고 로드에게 보고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레드로빈은 제이슨이 그랬듯, 제이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긴장에 바짝 솟은 까만 토끼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손을 댈 때마다 제이슨의 몸이 움찔움찔 떠는게 게 몹시 귀여웠다. 두렵지 않은 척, 강한 척 구는 이 토끼를 얼른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토끼의 신체 한 구석에 뱀 문신을 그려넣으면 정말 보기좋겠지. 이미 제이슨이 입을 제복 디자인까지 다 만들어놓았다. 원래는 허벅지 근처에 그릴 생각이었는데, 목 부근에 그려도 좋을 듯 싶었다.
"네가 여기 사람들 한 명을 직접 죽이면, 나머지는 다 살려줄게. 어때? 한 명만 희생하면 된다고."
"무슨 개씨발같은 소리야!! 내가 그딴 짓을 할 거 같아? 차라리 날 죽여!"
"그건 당연히 안되지. 제이는 나랑 같이 로드로 들어갈거니까. 네가 아무도 안 죽일거면 내가 한순간에 전부 죽일거야."
팀은 송곳니와 두 갈래로 갈라진 혀 끝을 내밀었다. 그러고보니 레드로빈은 독을 이용한 암살이 주특기라는 사실을 겨우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저 송곳니에서 흘러나온 독으로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 낼름거리는 혀가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변하니 너무나 꼴뵈기싫었다.
"자아, 제이슨. 난 인내심이 좋지않아. 얼른 고르는 게 좋을거야."
"씨발새끼..."
"그렇게 욕하는 거 엄청 섹시한 거 알지?"
"...."
제이슨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팀을 노려보고, 뒤편에서 로드군에게 붙잡힌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결과가 어떻든, 제이슨은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데미안은 하얀 망토가 쉴새없이 펄럭일 정도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평소 그가 즐겨 가는 안전 가옥들, 좋아하는 음식점, 배트케이브, 저택을 전부 다 찾아가봤지만 데미안이 찾던 제이슨 토드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불러 타 도시로 이동했다는 연락은 없었는데, 연락도 안 받고.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모처럼 데미안이 담당하던 구역에서 반란군 첩자를 발견해 그를 고문해서 유용한 정보를 얻은 참이었다. 얼른 이 소식을 제이슨에게 알려주고 잔뜩 칭찬을 받고 싶었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슬슬 초조함을 넘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첩자의 목을 베는 걸로 마무리 짓지 말고 살아있을 때 팔다리를 잘라놓고 방치할 걸 그랬다고 살짝 후회했다. 최대한 잔인하게 처리해놔야 그 꼴을 본 반란군따가 허튼 맘을 짓지 않게 될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데미안은 하얀 로드 유니폼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저택으로 올라갔다. 다음 순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데미안이 핫초코를 들고 응접실로 올라가니, 방금 막 순찰에서 돌아온 듯 레드로빈이 땀에 젖은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못본 체 지나가려 했지만, 팀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췄다.
"뭐야, 방금 전까지 제이슨을 부르며 돌아다니던 그렘린이잖아."
"...드레이크.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그야 임무를 마치고 방금 돌아왔으니까 그렇지. "
아무리 서로에게 무관심하다고 하지만, 로드가 직접 명령한 임무 일정같은 건 기억해줘야하지 않을까? 덧붙인 팀의 말에 데미안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며 팀을 흘겨봤다. 재수없는 개새끼. 방금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저택에 설치된 CCTV로 데미안이 뭘 하고 있었는지 진작에 파악했을거다.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끼는 카타나로 팀의 배를 몇 번이고 찌르는 생각을 했다. 저 깨끗한 유니폼을 새빨갛게 난도질하는 상상을 하니 좀 나아졌다.
데미안과 팀은 공공연한 숙적 관계였다. 둘 다 로드 배트맨의 첫 사이드킥인 레드후드가 비슷한 시기에 데려온 흑발청안의 아이들이란 공통 배경에, 무력도 재능도 엇비슷, 공적도 비슷비슷해서 둘을 대놓고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데미안은 그 부분이 짜증났다. 천하의 데미안 알굴-웨인이 팀 드레이크같은 수준 낮은 녀석과 비교당하다니. 자신은 분명 팀보다 훨씬 수준높고 강인한 전사였다. 제이슨도 그 역량과 잠재능력을 보고 데미안을 데려왔다. 그래서 어떻게든 제이슨에게 더 잘 보이고자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당사자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더 이상 팀에게 신경쓰지 않고 그만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팀의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겸사겸사 제이슨 얼굴도 보고왔고."
"토드, 토드 어딨어?"
"지금 찾아가봤자 못 만나. 지금 바쁘거든."
"뭐?"
"그 유명한 에이전트 37, "딕 그레이슨"을 만나러 갔거든."
"한낱 반란군 나부랭이를, 토드가 직접 만나러 갔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지? 자세히 말해!"
데미안은 팀의 멱살을 잡아챘다. 허튼 소리를 한다면 바로 목을 졸라 처리해버릴 생각이었다. 팀의 말은 지금 제이슨이 반란군과 내통한다는 투로 들렸다. 팀은 데미안이 살기를 내뿜으며 노려보던 말던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데미안을 가소롭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난들 알겠어? 나도 복귀하다가 옥상에서 싸우던 제이슨과 에이전트 37을 발견한거야."
"왜 토드를 안 돕고 온거지? 반란군 간부를 만나면 즉시 생포해야하잖아."
"제이슨이 끼어들지 말랬어."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팀을 놔둔 뒤 다시 현장에 나가기 위해 유니폼을 갈아입으러 뛰쳐나갔다. 데미안까지 가버리고, 혼자 남은 팀은 그제서야 한숨을 푹 쉬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팀도 심정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딕 그레이슨.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저항군을 모아 군대로 성장시킨 통솔자. 그에 대한 모든 정보는 일급 기밀로 다뤄져 로드 배트맨 정도의 위치가 아니면 관심을 갖는 것조차 죄로 치부된터라 다들 이 정도까지만 알고 있는데, 팀은 아주 옛날 로드가 만들어지기 전부터의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기에 딕의 정보를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한때 나이트윙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금기어고, 에이전트 37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라면 로드 배트맨의 첫 사이드킥이어야 했던 그는 어느날 돌연 로드를 배반하고 저항군 편에 섰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제이슨 토드가 이어받았다. 제이슨, 레드후드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딕의 행동을 완전히 덮으려고 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미친듯이 반란군을 잡아들였다. 그때 팀은 거침없던 그의 로드 행적에 반했고, 더 가까이서 함께 하고 싶어서 여러 무모한 행위를 벌였고, 결과적으로 제이슨에게 직접 선택받았다. 데미안 알굴이라는 어디서 굴러들어온 애새끼와 함께라는 부분은 잠시 잊기로 하고.
"그래서, 에이전트 37과 우리 레드후드는 무슨 관계일까..?"
분명 평범한 로드 배트맨의 제자 관계는 아니었을 거라고, 팀의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이슨 토드의 아킬레스 건. 이걸 알아낸다면 필시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올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로빈은 금기를 파헤치고 싶었다. 호기심을 충족하고, 아킬레스 건을 알아내 제이슨의 목에 목줄을 걸고 제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었다. 너무 탐나고 갖고 싶어서 흠집이 나더라도 억지로 훔쳐와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꼭꼭 숨겨두고 나만 보고 싶은 심정이랄까.
슬슬 탐정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팀은 먼저 데미안과 제 히어로 이름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로빈'의 유래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제이슨은 제 아래에 깔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딕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전엔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의 사나이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그저 가냘픈 목숨을 쥔 너덜너덜한 생명체에 불과했다. 딕의 군용 갑옷은 사방팔방 해체되어 갑옷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지만 제이슨의 로드 코스튬은 새것 그 자체였다. 반란군의 더러운 피 한 방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눈 앞에서 흔들리는 하얀 망토를 보며 딕은 지친 목소리로 웃어버렸다.
"리틀윙, 많이 무거워졌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알피가 여전히 밥을 잘 주나봐. 그렇게 삐쩍말랐던 네가 이렇게 컸잖아."
"....지금 농담이나 할 때냐? 내가 두렵지도 않냐고. 왜,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 네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음, 언젠가 이렇게 싸울거라 예상은 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항상 말했잖아. 로드는 잘못됐어."
딕은 부들부들거리는 팔을 겨우 들어 제이슨의 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 제이. 내가 널 어떻게해서든 너랑 같이 거길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헛소리. 넌 그냥 배신자일뿐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니 너무 슬픈데. 그렇지만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로드의 정책은 잘못되었단걸."
"글쎄."
제이슨의 창백한 피부에 딕의 뜨거운 핏자국이 호선을 그려나갔다. 하여튼, 옛날에도 이런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중얼거렸던 딕이었다. 그 모습에 반해서 졸졸 따라다녔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처음 브루스의 손을 잡고 웨인가에 들어왔을 때, 모든 게 너무나 낯설었던 그때 먼저 다가와 준 게 딕이었다. 알고보니 제이슨을 데려오도록 딕이 강력히 추천했다고 들었다 . 왜 나를 데려오고 싶어했냐는 제이슨의 물음에 딕은 그냥, 천진만난하게 웃던 네가 너무 사랑스러웠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렇게 나란히 로드 제복을 받고 함께 다닐 줄 알았는데. 제이슨은 가만히 딕의 손길을 느끼다가 팔을 붙잡았다.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로드로서 현재에 충실해야 했다.
"딕 그레이슨. 로드를 배반한 죄, 반란군에 협력한 죄로 널 체포하겠다."
"리틀윙, 한 번만 봐주지 않을래? 아직 못한 일이 많은데."
"닥쳐."
레드후드는 총을 들어 에이전트37을 기절시키려 했고, 딕은 한때 곡예사였던 경험을 살려 뒷발로 후드의 뒤통수를 가격해 빈틈을 만들어냈다. 로드의 우위처럼 보이던 상황이 금새 변했다. 딕은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친 채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레드후드'라는 별명과 다르게 제이슨의 유니폼엔 빨간색이 하나도 없었다. 저 징글징글한 하얀색. 제이슨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때나, 즐겨 입던 빨간 후드티를 입었을 때가 가장 잘 어울렸다. 저 유니폼을 찢을 날이 오긴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딕은 제이슨의 총알 세례를 운좋게 피하고, 곧장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래에는 동료들이 미리 설치한 장치가 있었다. 제이슨은 곧장 딕을 따라가려 했지만, 때마침 현장에 도착한 데미안의 존재에 다음을 기약했다. 어차피 딕이랑은 다시 만날 운명이었다. 이번 만남도 딕이 먼저 접촉을 시도한 거기도 했고.
"레드후드! 에이전트37과 전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 방금 놓쳤어. 여전히 교활한 수를 쓰더군.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지?"
"이스트엔드의 반란군에 대한 동향을 알아왔어. 케이브에 업로드해놨고, 이걸로 그것들의 기세를 한 풀 꺾을 수 있을거야."
레드후드는 로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에 손을 탁 얹었다.
"잘했어. 로드도 기뻐할거야."
레드후드의 칭찬 한마디에 로빈은 자꾸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어 결국 고개를 휙 돌렸다. 어른처럼 감정을 숨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참 애답고 꽤 귀여웠다. 제이슨은 이럴 때 제 유니폼이 다른 사람들처럼 도미노가 아니라 헬멧 형태라는 점에 감사했다.
제이슨은 데미안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로드의 수배에 올라가 있던 라스 알 굴을 팔아 그 공적을 인정받아 로드에 들어온 작은 소년. 브루스 웨인의 아들이 있단 소리에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갔던 그곳에서 만난 데미안. 홀로 리그 오브 어쌔신을 소탕하고, 온 몸에 피를 묻힌 채 빨간 헬멧을 보고 "우리 닮았네." 라고 중얼거렸던 아이는 어느새 후드의 옆자리에 나란히 서 있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작은 로드가 되었다. 제이슨은 가끔 데미안의 이 순수한 동경을 제가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마치 딕이 제 감정을 짓밟았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자, 로빈."
"알겠어."
레드후드가 먼저 그래플링 건을 쏴 이동하자, 로빈도 뒤따라 옥상을 떠났다. 곧 로드의 대대적인 반란군 소탕 작전이 일어날 예정이었다.
@: 슨이 오메가인거 가족들 다 알아서 향 궁금해서 기웃기웃거려보는 딕인데
갈때마다 뎀이 묻혀놓은 향만 나서... 얼굴만 꾸기고 오는 큰형아...
나이트윙은 능숙한 솜씨로 바깥 창문의 삼중 잠금장치를 열고는 가뿐하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걸 재차 확인하고서 목에 붙인 향기 차단 패치를 뜯어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집안에 스며들어 있는, 예민하게 벼려진 알파의 기분을 사르르 녹일 부드럽고 달콤하며 향기로운 오메가의 향을 기대했지만 막상 느껴지는 건은 어느 알파의 표독스런 영역 표시 페로몬이었다.
설마 레드후드의 안전가옥이 아니라 민간인 집으로 잘못 들어왔나 싶어 바로 좌표를 확인했지만 주변 인테리어도 그렇고 좌표도 그렇고 딕이 알고 있던 제이슨의 집이 맞았다. 거기다가 이 페로몬, 계속 맡아보니 꽤나 익숙한 알파의 향이었다.
"..데미안...."
딕은 인상을 팍 쓰고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들어온 그대로 다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바깥의 찬 공기가 이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고담 특유의 안개가 낀 공기를 몇 번이고 잔뜩 들이마신 후에야 좀 진정할 수 있었다. 가족끼리도 이리 역한데 낯선 알파였다면 향을 맡자마자 까무라칠게 뻔했다.
이후 딕은 알고 있는 레드후드의 안전가옥을 죄다 돌아다녔지만 그때마다 제이슨의 포근한 오메가향이 아니라 데미안의 짙은 향이 그를 반겼다. 귓가에 장성한 데미안이 "소용없어, 그레이슨." 하고 비웃는 듯한 환청이 들려 괜히 속이 쓰라렸다.
제이슨은 부활하고 나서야 뒤늦게 오메가로 발현했다. 그마저도 향기 차단 패치를 계속 붙이고 다녀서 레드후드가 오메가라는 걸 박쥐들이 알게되기까지 오해와 상처가 뒤섞여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담을 잔뜩 들썩거리게 만든 다음에는 갑자기 우주로 가버리더니만 아웃로즈라는 팩을 만들어놓기까지 했다. 그렇게 제멋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수많은 추적기와 박쥐식 소통끝에 겨우 브루스와 화해의 포옹을 하고, 그즈음 알파로 발현한 데미안의 미친 고백공격을 받고서 간신히 고담에 정착했다.
제이슨이 웨인 가 오메가로서 저택 생활에 익숙해지는 동안 가족들은 그의 오메가향을 마음껏 맡고 서로 향기 교환을 하며 팩 결속력을 굳게 다졌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 하필이면 그 시기에 타이탄즈 관련 심각한 사고가 발생해 뒷처리하느라 고담을 떠나있었던 딕 그레이슨이었다.
딕은 제이슨의 오메가 향을 제대로 맡아본 적이 없었다. 레드후드로 싸울 때는 향기 차단 패치때문에, 제이슨 토드로 있을 때는 데미안이 과시하듯 남겨놓은 알파 마커때문이었다. 안전가옥에 남아있는 오메가향이라도 맡아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펍 시절 맡았던 옅은 꽃향기라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너무 시간이 흘러서인지, 아니면 데미안의 알파향때문에 코가 멍해졌는지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같은 가족끼리 향 좀 맡자는데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딕은 갑자기 억울해졌다. 설마 내가 남의 아내를 뺏어갈 무책임한 알파처럼 보이는거야, 데미안? 딕은 소리없이 허공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러나 데미안이라면 왠지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불안감이 스쳐 바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제이슨의 오메가향... 음... 달달하고 좋아. 라자러스핏때문인지 다른 오메가보다 향이 더 진한 거 같아. 특히 나한테는 미안한 게 많아서 그런지 열심히 향 풀고 교감하려고 하더라고. 근데 요즘은 데미안 그 미친 그렘린새끼가 향을 얼마나 묻혀놨는지... 어우, 솔직히 둘이 같이 지내는 방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힘들어."
팀은 딕의 하소연에 격한 공감을 표하며 쉴새없이 데미안의 욕을 했다.
"제이슨? 요즘 시계탑에 올때마다 편하게 향을 풀고 다니는 듯 보여. 물론 너도 알다시피 제이슨 가는 곳엔 데미안도 오니까 여기에 와도 오메가향은 못 맡을거야. 캐스가 올때마다 아주 말은 안하지만 표정이 굳더라고. 여기 향을 못맡는 베타도 있는데 그냥 포기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바바라는 딕에게 공감했으나 냉철하게 의견을 내놓고는, 때마침 근처에 강도사건이 발생했다며 좌표를 전송했다.
"데미안 도련님의 사회화 교육은 아주 순조롭게 잘 끝내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듣자하니 난다 파르밧에는 오메가 배우자에게 알파향을 묻혀 상대 파벌에게 과시하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도 데미안 도련님의 경우에는 정도가 지나친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몇 번 주의를 드렸지만 변함이 없으시더군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차차 나아지실겁니다."
알프레드는 딕의 심정을 이해한다며 차를 건넸다. 배트맨조차 얌전히 말을 듣게 만드는 웨인 가 집사여도 데미안의 소유욕에는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듯 했다.
"그렇지 않아도 데미안에게 주의를 준 참이었단다. 저렇게 알파향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으니 말이다. 하아, 누굴 닮았는지 영 말을 잘 듣지 않는 듯 해."
브루스는 카울을 벗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딕에게 대꾸했다. 누굴 닮았긴요, 딱 브루스를 닮았는데요. 특히 엄청 고집불통이라는 점이. 딕은 퉁명스런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데미안이 저러는 이유를 대충은 알 거 같아. 몇개월 전, 자선 기부 파티였을거야. 어떤 중년 알파가 제이슨한테 껄떡거리더라고. 세상에! 제이슨이랑 데미안이 결혼한다고 고담 타임즈에 대문짝하게 실렸는데도! 그렇게 구는 머저리같은 놈이 있었다니까! 물론 데미안이 그 알파한테 주먹을 날리고 아주 갈갈이 날뛰어서 파티는 아-주 인상깊게 끝났지. 하여튼간에, 그 전에도 자기 향을 잔뜩 묻혀놓고 다녔다고 들었거든? 근데 그때 이후로 데미안이 미친듯이 향을 쳐발라놔서 제이슨 근처에 가지도 않아. 봐봐, 지금도 다들 간격을 유지하고 있잖아. 그래서 시무룩한 제이슨 표정을 구경하는 건 또 덤이지."
스테파니는 깔깔 웃으며 딕에게 신나게 털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은 제이슨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 꽤 멀어져 있었다. 딕 또한 벌써부터 데미안의 진득한 알파향이 코 끝에 맴도는 듯 해서 주춤거렸다.
대화 끝에, 제이슨에게 알파페로몬이 넘실거리는 이유가 데미안의 딕 견제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었으나 그와 별개로 정말 제이슨의 오메가 향을 조금이라도 맡아보고 싶었다. 향을 맡으며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를 느끼고 싶었다. 더군다나 딕은 다른 사람들처럼 고담에서 생활하는 게 아니라 블러드헤이븐과 고담을 오가고 있어서 유대감 소모가 더 빠른 편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가족을 우선시하는 딕이어서 더더욱 그랬다. 내 동생의 오메가향을 맡지 못한다니, 너무 서글픈 일이었다. 딕은 땅이 꺼져라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나이트윙은 오랜만에 레드후드와 함께 블랙마스크의 마약 거래 사업을 방해하러 나섰다. 향기 차단 패치를 붙여서인지 레드후드에게는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그래, 알파향이 풀풀 풍기는 것보단 차라리 무향이 더 나았다. 정신없이 에스크리마스틱으로 불법 거래에 나타난 사람들을 후드려패고 샘플들을 모조리 회수했다. 죽은 사람은 없고, 둘 다 별로 다친 데도 없고, 케이브로 돌아가기 전 가볍게 간식거리 하나 사들고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시간도 넉넉했다. 레드후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나이트윙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나이트윙. 있잖아."
"왜?"
"...너만 내 오메가향을 맡지 못해서 혼자 기죽어있다고 들었는데."
"윽, 누구한테 들었어? 아냐, 스포일러겠지. 설마 오라클인가?"
딕의 날선 반응에 제이슨은 참지 못하고 푸핫 웃어버렸다. 오랜만에 재밌는 건수라도 잡은 듯, 레드후드의 목소리엔 기계음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묘한 즐거움이 묻어나 있었다.
"놀리지 마. 후드. 난 진짜 무척 심각해."
"천하의 딕윙이 향 하나 못맡았다고 죽을상이라니.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군. 근데 데미안이 욕심을 좀 많이 내긴 했어. 지금이라도 향 풀어줄까?"
딕은 멈칫했다. 좋다고 대답하려던 순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로빈은 슈퍼보이와 함께 메트로폴리스에 볼일을 처리하러 갔다. 나이트윙은 잽싸게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범죄자들을 체포하러 온 GCPD마저 떠난 텅 빈 항구에는 나이트윙과 레드후드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고나서 리틀 디가 나 죽이러 달려들진 않겠지?"
"설마. 만약 칼 들고 설쳐대도 내가 커버쳐줄게."
레드후드가 고개를 젖혀 목에 붙인 투명한 향 차단 패치를 벗었다. 점차 향기로운 오메가향이 날거라고 기대했으나 당연하리만치 데미안의 알파향이 올라왔다. 딕은 코를 붙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딕의 반응에 제이슨도 킁킁거리며 향을 맡았다.
"아, 맞다. 나 곧 히트오거든. 혹시 몰라서 데미안한테 페로몬샤워 좀 해달랬는데 그게 남아있었나봐."
".........이거 지금 둘이 짜고 치는거야?"
나이트윙은 허망한 표정을 짓고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장남을 실컷 놀린 제이슨은 자기가 술 한 잔 사겠다고 딕을 일으켜세웠다. 이참에 제이슨은 딕의 흑역사를 생성해보겠다는 듯 술을 잔뜩 시켰고, 딕 앞에 놓인 잔이 비지 않도록 기꺼이 술을 따랐다. 오늘따라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술이 짜증나리만치 달았고, 술이 훅훅 들어갔다.
그렇게 저택에 돌아가서 가족들 앞에서 하소연을 담은 술주정을 한 딕은 다음날,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니 옆에 데미안이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좋은 아침?"
"TT, 밤새 아주 꼴값을 다 떨더군. 특히 비러브드의 향을 못맡는다며 난동을 피우던 것 말야."
"윽, 부끄럽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날밤의 소동이 스멀스멀 기억나기 시작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제이슨이 주는 술을 고대로 다 원샷으로 들이마셨더라지. 그나저나 이 문제의 장본인이 왔으니 이 기회에 좀 물어봐야겠다 싶어, 방을 떠나려던 데미안을 붙잡고 제이슨에게 한 알파 마킹이 너무 진하게 된 거 아니냐, 이러면 가족 마킹이 되지 않으며 오랫동안 페로몬 교환이 되지 않으면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최대한 좋게좋게 돌려 물었다.
"내가 내 반려에게 내것이라고 표시하는 건데 뭐가 문제지?"
"문제없지! 문제없는데,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
"글쎄. 딱 괜찮은 거 같은데. 쓸데없는 놈들도 안 꼬이고."
"적어도 가족들 앞에서는 절제할 수 있잖아."
"굳이?"
데미안은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속터져 죽으려 하는 딕을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END-
'연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슨른/ 꾸금연습단문들 (0) | 2024.05.31 |
|---|---|
| 연반뎀슨/ 서큐버스 제이슨 (0) | 2024.04.02 |
| 뎀슨/ 무제 (0) | 2023.10.12 |
| #슨른전력_60분 / 230930 탈론딕슨 (0) | 2023.10.02 |
| #슨른전력_60분 / 230819 뎀슨 (0) | 2023.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