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오아시스 [3]

연성2022. 6. 13. 00:02

<인어슨른 온라인 온리전 Dive Into The Ocean>

뎀슨 / 인어 AU / 슨른 기반

[1]     [2]     [4]

  이곳은 모든 게 고담과 다르다. 제이슨은 수조 너머 보이는 건조한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고담은 도시고 이곳은 사막이니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환경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와 구성원들이 다른 도시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만약 제이슨이 배트맨을 도와 패트롤을 보조한 적이 없다면 ‘이국적인 분위기라 좋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고담의 일면을 보고 감각을 익힌 자로서, 이들은 일반 시민이라기보다는 무슨 조직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이곳 수장인 라스 알굴을 본 순간, 제이슨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떨었다. 그건 인어라는 낯선 존재를 낮잡아보는 눈빛이 아니라,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이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친해진 사람, 데미안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조금 긴장이 풀렸을 텐데 축제를 즐기느라 바쁜지, 아니면 이곳 감시가 삼엄하여 왕자라는 지위를 가지고도 찾아올 수 없는 건지 축제 기간 내내 그를 볼 수 없었다. 아, 밖에서 야외 무대를 진행할 때 관객석에 앉아 있던 그를 보긴 했었다. 가까이서 자주 만났으니 이제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심드렁할 만도 한데. 제이슨의 움직임을 좇으며 한순간도 눈을 못 떼는 게 꽤 귀여웠다.

 ‘그건 그렇고, 여긴 처음 오는 곳이야.’

   라스 알굴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도, 야외 무대로 이동하는 통로도 아닌 처음 보는 길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간간히 들리던 주변 소음이 점점 사라지고 몸에 소름이 자꾸 돋는 걸 보니 어디 으슥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제이슨은 수조를 끌고 가는 경호원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저들을 제압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수조가 엎어지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인어는 물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설령 수조가 온전하다고 해도 제이슨 혼자 이 수조를 끌고 바깥으로 갈 수도 없었다. 지금은 그냥 잠자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이 길이 어디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유심히 바라보면서.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인어가 담긴 수조는 긴 통로를 지나 어느 육중한 철제문 앞에 다다랐다. 두터운 문을 열자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의 공간이 드러났다. 지금까지 제이슨은 호텔처럼 꾸며진 방에서 머무르고, 고풍스런 카펫이 깔린 길을 지나갔는데, 이곳은 무슨 실험실처럼 보였다. 널찍한 철제 책상이 놓여 있고. 준비된 작업실이었다. 바닥은 물청소가 쉽도록 타일이 깔려있고, 벽에는 물호스가 비치되어 있다.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제이슨은 역한 냄새에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진행하는 건가?”
 “그래. 연회에 늦지 않게 얼른 손질하고 끝내자고.”

  경호원들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한 명이 순식간에 제이슨의 목을 거칠게 붙잡고 그대로 수조에서 꺼내 들었다. 갑작스런 고통에 제이슨은 눈을 크게 뜨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마저도 입이 막혀서 할 수 없었다. 코와 아가미를 동시에 눌러서 호흡이 불가능해 제이슨은 가까스로 손톱을 세워 경호원의 손과 팔을 긁으며 발버둥 쳤다. 제이슨을 붙잡은 경호원은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지, 거센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83cm의 제이슨을 한손으로 제압해 그대로 책상에 내팽겨쳤다. 제이슨은 숨을 몰아쉬며 계속 헐떡거렸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이렇게 쉽게 제압당할 리가 없는데. 그동안 다른 한 명은 캐비닛에서 조명을 받고 날카롭게 빛나는 기다란 손질용 칼을 꺼냈다.

 “으윽!”
 “가만히 있어라.”

  제이슨은 칼을 보고 도망치려고 미친 듯이 팔과 지느러미를 휘적거렸다. 제이슨의 몸부림을 가가볍게 제압한 경호원은 주사기를 꺼내 재빠르게 제이슨의 팔에 꽂았다. 인어의 피부는 강철보다 단단해서 저런 주사기 바늘이 들어가지 않아야 정상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의문의 약물은 효과도 빠른지, 제이슨의 살고자 하는 의지와 정반대로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경호원은 축 늘어진 제이슨의 팔을 족쇄로 고정시켰다.

 “꽤 놀란 모양이군. 이곳의 도구는 전부 인어를 손질하기 위한 특이 물질로 만들어졌다. 주사기 속 약물에는 인어를 무력화시키는 약물이 들어있지. 참고로, 네가 들어있던 수조에도 동일한 약물이 섞여 있었어.”
 “씨발, 이거 놔!”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네 녀석은 인어 배양의 표본으로도 쓰일 테니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보내주마.”

  칼끝이 제이슨의 목을 겨누고 있다. 제이슨은 눈을 감았다. 생리적인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나왔다. 몸 안쪽부터, 피부와 내장이 메말라가는 게 느껴진다. 제이슨은 이빨을 까드득거렸다. 고담을 벗어날 때부터 이럴 거라 생각했잖아. 인어의 최후는 인간들에게 잡혀서 살아있는 박제로 평생을 죽지 못해 살거나, 이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다. 여태껏 세상을 떠돌면서 다른 인어들의 최후를 봐왔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바다를....
  칼이 피부를 뚫는 고통 대신, 예기끼리 서로 부딪쳐 나는 날카로운 소음이 들렸다.

 “다들 그에게서 떨어져!”
 “데미안 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죠? 당신은 따로 할 일이 있으실 텐데요.”
 “닥쳐. 인어는 죽일 수 없어. 내가 데려가겠다.”

  제이슨은 얼굴에 떨어지는 핏방울에 얼굴을 찌푸렸다. 눈을 살짝 뜨니 칼을 들고 있던 경호원의 손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간 게 보였다. 데미안은 피가 묻은 칼을 소매로 닦고, 책상 위로 올라가 제이슨을 사이에 두고 경호원들과 대치했다.

 “이건 라스 님의 명령입니다. 제아무리 당신이라도 막을 수 없어요.”
 “나 또한 마찬가지야.”

  데미안은 날렵하게 손목이 잘린 경호원에게 다가가 빠르게 일말의 망설임 없이 목을 베었다. 다른 경호원이 칼을 들고 데미안에게 덤볐으나 데미안의 공격을 막아내는 덴 역부족이었다. 이들 또한 라스가 직접 선택한 숙련된 암살자였지만 데미안 앞에서는 바람에 나부끼는 촛불만도 못한 존재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타일을 붉게 물들였다.


  삽시간에 2명을 죽인 그는 다른 잠복 인원이 있는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아직까진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이곳에도 CCTV가 설치되어 있을 테니, 경호원의 죽음이 라스에게 곧장 보고될 거고, 데미안과 제이슨을 처리하고자 다른 암살자들이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전에 제이슨을 데리고 팀 웨인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해야 할 일은 많고 머리는 복잡했다. 이곳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일단, 일단은 제이슨이 괜찮은지 확인부터 해야겠다.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으악!” 하고 제이슨의 비명이 들렸다. 데미안은 칼을 쥐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문 근처를 살폈지만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까까진 멀쩡했던 탁자가 뒤집혀 있는 게 보였다.

 “으....”
 “토드! 괜찮- 뭐, 뭐야? 너 꼬리가!!”
 “어, 어, 내 꼬리가...?”

  책상 밑으로 넘어진 제이슨의 하체, 새빨간 지느러미가 새하얀 다리로 변해 있었다. 당연히 제이슨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전라 그대로 데미안에게 보여졌고, 갑자기 사랑하는 이의 나체를 보게 된 데미안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데미안은 입고 있던 겉옷을 서둘러 벗어 몸 일부분을 가렸다. 제이슨도 뒤늦게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눈치채고 얌전히 데미안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이런 전개는 예상치 못했는데. 데미안은 제이슨이 진정할 때까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제이슨은 다리가 신기한지 좀처럼 두 다리를 가만두지 못했다. 데미안은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가려는 걸 참고, 대신 제이슨의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매로 슥슥 닦아내었다.

 “괜찮아?”
 “그래. 너무 놀라서 아직도 심장이 엄청 뛰긴 하는데, 일단 괜찮아.”
 제이슨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구해줘서 고마워.”

  제이슨은 데미안을 보고 기운을 차리려 했지만, 파도가 밀려오듯 무력감이 몸을 덮쳐와 그러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납치범에게 붙잡혀왔지만, 맷집과 실력 그리고 약간의 운으로 탈출해왔었다. 어쩌면 라스 알굴에게 잡혔던 순간부터 의심해봤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몸에 약 기운이 돌고 있어 그런지 평소보다 더욱더 피곤했다. 거기다 사방에 퍼진 피 냄새와 수상쩍은 약물은 인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제이슨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데미안은 조심스레 제이슨의 손등에 손을 올려놓았다. 제이슨은 잠깐 움찔, 떨었지만 데미안의 손길을 쳐내지는 않았다.

 “쟤네 죽일 때 거침없더라, 왕자님. 많이 해봤나 봐.”
 “난...”
 “첫 살인이라고 하지 마. 여태껏 네게서 피 냄새가 많이 났었으니까.”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이슨은 데미안더러 쇠비린내가 난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때부터 데미안의 정체에 대해 지레짐작했겠지만,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겠지. 데미안 또한 그걸 알아차리고 되도록이면 인어 앞에서 살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방금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걸 보고 이제 자신을 싫어하면 어쩌지. 사실 난 암살자 집단에서 자랐고, 널 탈출시키기 위해 살인을 마다하지 않을 거란 걸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어. 그래도 숨기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밝히는 게 나았다.
 
 “토드, 난-”
 “데미안. 네가 지금까지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방금은 날 구하려고 한 거잖아. 이걸로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네가 오지 않았더라면 난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을 테니까.”

  제이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어 또한 한때 과격한 사상을 가졌고,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바다에 빠뜨려 죽인 숫자가 꽤 많지. 그러니 데미안에게 지금은 살인에 대해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건 됐고, 보다시피 나한테 지금 다리가 생겼는데 어떻게 생각해?” 제이슨이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이야기했다. 원래 몸이 근육질이어서 그런가. 허벅지가 꽤 튼실했다. 거기다 원래 이렇게 공기에 노출되면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메말라서 바로바로 물을 적셔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호흡하는 것도 굉장히 편했다. 문득 제이슨은 목 부근에 있던 아가미가 흉터처럼 남아있는 걸 알아차렸다.

 “너랑 저 사람들 싸울 때, 갑자기 목걸이에 달린 보석이 뜨거워지길래 떼어 내려고 힘 좀 썼거든. 마취제에 당해서 내가 얼마나 힘쓸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힘껏 족쇄를 뜯어냈는데, 그만 책상이랑 같이 뒤집혔더라고. 정신 차려 보니 이렇게 다리가... 인간이 된거야.”

 두 사람의 시선이 새하얀 다리로 향했다. 인어의 다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한 인간의 다리였다. 상체와 다리에 드문드문 돋아나 있는 연분홍의 비늘 조각만 아니었다면 제이슨이 인어였다는 걸 믿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군. 다른 데 아픈 덴 없어?”
 “어, 그 전에 네가 날 구해주러 왔잖아, 왕자님.”
 “...”
 “얼굴 빨개진 거 귀엽네.” 

 제이슨은 킥킥 웃으며 데미안의 상기되어 있는 볼을 쿡 찔렀다. 약이 점점 해독되어 가는지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힘이 돌아오니 기분도 점점 나아졌다.

“그리고 이 목걸이 안 끊어지고 튼튼하더라. 목걸이가 날 지켜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야.”

 데미안은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듀크라가 말했던 게 이건가? 데미안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그건 제이슨에게 다리가 생겨서 수조가 없어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목걸이에 주술이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목걸이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겠지. 

 인어가 자유의지로 다리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그랬다면 제이슨은 진작에 이곳을 탈출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가능성은 목걸이나, 아니면 아까 경호원들이 언급했던 약이 무슨 성분 충돌을 일으켜 부작용을 일으킨 걸지도 몰랐다. 섣불리 단정 짓지 말고 이것저것 따져봐야 했다. 새로 생긴 다리가 제이슨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야, 이거 느낌 되게 신기하다. 다리가 서로 제멋대로 움직여. 이거 내 몸 맞아?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걷는 거냐?” 제이슨은 두 다리를 동당거렸다.

 “토드, 신난 건 알겠지만,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해. 우린 여길 탈출할 거다.”
 “어디 생각해놓은 곳은 있고?”
 “고담, 바다가 보고 싶다며.”
 “...응, 그랬지.”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는데, 좀 도와줄래?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제이슨의 말에 데미안은 제이슨의 팔 한쪽을 잡고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옆에서 보조했다. 책상을 붙잡고 팔을 부들부들 떨며 겨우 일어나긴 했는데 문제는 다리였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상체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 땅을 밀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이론은 이해했는데 실행에 옮기기가 힘들었다.
  갓 만들어진 다리는 굉장히 연약했다.

‘이래서야 암살자들에게 곧장 제압당하겠군.’

 제이슨의 키가 워낙 크고 덩치도 제법 있어 제이슨보다 한참 작은 데미안이 그를 부축하기에는 조금 무리였다. 옆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보조는 해줄테지만, 걸어가는 건 오로지 제이슨이 해야 할 일이었다. 데미안은 옆에서 언제든지 바로 칼을 꺼내들어 반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입구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좀 도와줄까? 나도 그 사람이 필요하거든.”

  데미안은 칼을 쥐고 팀을 노려보았다. 팀 웨인,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거기다가 팀이 말하는 그 사람은 제이슨을 칭하는 게 분명했다. 거기다 주변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데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란 건 확실히 알았다. 그런데 ‘인어’가 아니라 ‘제이슨’이 필요하다니, 팀의 태도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역시 적으로서 죽여버려야 했을까.

 “칼은 집어둬. 데미안, 너랑 난 적이 아니야. 오히려 동맹 관계라고나 할까. 우린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원하는 게 뭐지?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제이슨 토드를 고담으로 데려가는 것. 그뿐이야.” 

 이름은, 방금 대화를 듣고 알았지. 팀은 별 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두 사람 떠드는 소리가 바깥까지 다 들린다고.

 “뭐야, 너 나 알아?”

  제이슨이 소리쳤다. 팀은 반나체의 제이슨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럼, 알고말고. 우리 구면인걸?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겠지. 난 팀 드레이크. 인어를 데리러 왔어.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여길 탈출하고 마저 하자고. 방금까지 다른 암살자들을 쓰러뜨리고 온 길이니까.”

  제이슨은 팀의 설명을 듣고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나쁜 녀석 같진 않지만 그건 일반인의 감이고, 데미안은 수상쩍은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으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데미안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는 팀을 이용하려고 했다. 팀이 무슨 목적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용할 수 있을 만큼은 이용해야겠지.

  데미안의 살기가 누그러뜨려지자, 팀은 품에서 옷을 꺼내며 제이슨에게 다가왔다. 팀은 제이슨의 몸을 눈으로 쭉 훑었다. 인어였을 때도 굉장했지만 지금도, 여러가지 의미로 너무나 훌륭했다. 그건 그렇고, 왜 그가 옷을 챙기라 말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제이슨, 이거 좀 입어볼래? 그렇게 벗고 다닐 순 없잖아.” 몸이 좋아서 보는 맛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진 않아. 팀은 뒷말은 삼켰다.
 “고, 고마워.”
 “옷 사이즈가 맞을지는 모르겠네. 허리는 맞겠는데....”

  팀의 시선이 제이슨의 가슴에 머물렀다가 데미안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금방 사라졌다. 제이슨은 몸에 딱 맞는 옷이 불편한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소매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특히 그렇지 않아도 다리 움직이기가 어색한데 거기에 바지까지 입으니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듯 했다. 팀과 데미안은 양쪽에서 제이슨을 부축하며 걸어 나갔다. 둘 다 제이슨보다 키가 작은지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사람에게 기대던 제이슨은 몇 걸음 못 가 둘을 떨쳐냈다. 팀과 데미안은 제이슨을 사이에 두고 그의 보폭에 속도를 맞추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옥상에 내 전용 헬기가 있어. 그리로 탈출할 거야.”
 “그게 함정이 아니란 걸 어떻게 믿지?”
 “다른 방법이 있어? 어차피 너도 날 협박해서 이곳을 떠날 계획이었을 텐데.”

  정곡을 찔린 데미안은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나긴 통로 주변에 팀이 쓰러뜨린 암살자들이 보였다. 전부 데미안의 클론들이었다. 흠, 데미안은 저들과 똑같은 얼굴의 자신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는 팀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전부 기절시킨건가?”
 “살인은 지양하는 편이라.”
 “흠.”

  팀 웨인이 이들을 대체 어떻게 쓰러뜨린 걸까. 그것도 죽이지 않고 기절로 제압하다니. 이런 실력을 가졌는데 평범한 COO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설마 이 녀석이 배트맨인가? 배트맨 본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조력자인 건 확실했다. 데미안은 팀에 대한 의심을 대놓고 드러냈다. 팀은 제이슨은 몰라도, 데미안에게 있어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제이슨과 떨어지는 순간, 처치당할지도 몰랐다. 아무쪼록 팀 웨인을 경계해야겠다.

  “잠깐만, 애들아.” 제이슨이 우뚝 멈춰섰다.
  앞에 누가 있어. 제이슨의 말에 둘의 대화가 멈췄다. 저 까마득한 복도 끝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지금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건 늦었다. 이 살기는 이제껏 데미안이 만난 암살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농도를 갖고 있었다. 분위기만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사람. 분노를 숨길 수 있지만 일부러 숨기지 않은 자. 팀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등 뒤에서 보 스탭을 꺼내들었다.
  세 사람이 가만히 서 있자, 어둠 속에서 라스 알굴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꽤 짖궂은 장난을 쳤구나, 데미안.”
 “조부님.”
 “인어가 어떻게 인간의 다리를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흥미로워. 이제 그를 돌려주면 오늘 있었던 일은 책임을 묻지 않으마.”
 “싫다면?”
 “부디 현명한 결정을 하길 바라네, 어린 탐정이여.”

  라스의 손짓에 사방에서 그를 따르는 암살자들이 조용히 나타나 세 사람을 에워쌌다. 팀과 데미안은 제이슨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대치했다. 아까 작업실에서, 인어의 살을 도려내는 무기가 있다고 들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무기도 그런걸까? 제이슨은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고담을 벗어났던 이유가 기억나? 배트맨과 로빈처럼 건물 사이사이를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구하고, 평화를 수호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잖아. 뛰어다닐 수 있는 다리가 없고, 남보다 특출하게 머리가 좋지도 않은 제이슨이 할 수 있는 건 컴퓨터 앞에 서 있는 것 뿐이었다. 그곳에 있으면 자꾸만 자기 처지가 비교되어 뛰쳐나왔던 건데, 그걸 다시 느낄 줄은 몰랐다. 제이슨은 주먹을 쥐고 떨었다.

  “인어는 최대한 흠집 없이 데려오고, 왕자와 어린 탐정은 적당히 혼을 내주거라.”

 

  라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암살자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데미안은 앞을 가로막는 암살자의 숨통을 끊고 곧장 라스에게 달려들었고, 팀은 최대한 제이슨을 보호하면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흠집을 내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그들의 칼은 인어에게 해를 주지 못하는 재질로 되어 있었고, 제이슨은 다리가 버티는 한 팀과 함께 맨몸으로 대항했다. 무작정 팔로 칼을 막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반격도 하면서 암살자들을 쓰러뜨려 갔다. 브루스에게 받은 훈련을 기억하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데미안은 암살자들을 처리하기보다는 라스를 공격하는 쪽을 택했다. 라스가 있는 한 제이슨의 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담에 가더라도, 어딜 가도 암살자들이 이미 잠입해있겠지. 그러니 그에게 힘을 증명하고 인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물론 라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급소를 기습하려는 데미안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역으로 반동을 이용해 데미안을 벽에 내던졌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대로 고통에 뻗어버리지 않고 일어나 공격 자세를 취했다.

 “네가 갖고 있기엔 아까운 칼이군. 이건 시간 낭비야, 데미안.” 라스는 여유롭게 데미안의 공격을 피하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어떻게든 라스를 죽이고자 덤벼들었다. 연회는 한창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슬슬 인어를 손질해 식탁에 올릴 필요가 있었다. 손자와 가볍게 놀아주는 것도 이제 끝이다.

 “네가 나에게 흠집 하나라도 내면, 저 인어를 포기하도록 하마.”
 “그 말 지키게 되실 겁니다.”

  물론 데미안은 라스 알굴을 이길 수 없었다. 데미안은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를 움켜쥐고 간신히 서 있었다. 이상했다. 라스는 데미안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처럼 전부 공격을 피하고, 빈틈을 노려 치명타를 주었다. 제아무리 그의 실력이 뛰어난들 데미안의 공격도 만만찮게 거세기에 몸에 흠집이라도 생겨야 되는 게 맞는데 그의 옷의 실오라기 하나 잘려 나가지 않았다. 이건 가망없는 소모전이었다. 라스는 돌아가면 손자의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간신히 서 있는 데미안을 칼로 찌르려 했다. 하지만 정작 피가 나는 것은 자신의 복부였다. 예리한 칼날이, 몸을 찔러댔다.

 “거기까지 하세요. 아버지.”
 “탈리아...! 역시 네가 꾸민 짓이로구나.”
 “여태까지 모르셨다는 게 더 놀랍군요.”

  사람을 이끌고 나타난 탈리아는 라스를 찌른 칼을 빼낸 후, 서둘러 데미안에게 달려가 그가 멀쩡한지 상태를 확인했다. 치료만 제때 받는다면 생명에 지장이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데미안. 내 말 들려?”
 “어, 어머니....”
 “정신 차려라. 티모시! 데미안과 제이슨을 데리고 가. 헬기에 의사가 대기중 일거야.”
 “알겠어. 이걸로 거래는 끝인가?”
 “데미안이 고담에 도착할 때까지.” 팀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암살자들은 탈리아가 데려온 이들이 맡아서 싸우던 중이라 팀과 제이슨은 이 틈에 데미안을 데리고 탈출구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초반보다 걷기가 익숙해진 제이슨이 데미안을 안아 들고 앞장섰고, 팀은 주변에 다른 암살자들이 없나 살피며 그를 뒤쫓아갔다. 데미안은 중간중간 의식을 잃을 뻔 했지만, 제이슨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기에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겨우겨우 버텨냈다.

 


  다행히 옥상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습격도 받지 않았다. 세 사람은 곧장 헬기에 올라탔다. 탈출을 위한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고, 헬기는 빠르게 에스 알테반을 벗어나 중간 경유지로 향했다. 헬기로 고담까지 바로 이동하기엔 무리가 있어, 이스탄불 근처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예정이었다.
  경유지까지 대략 1시간 정도 걸렸다. 데미안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며 헬기 너머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을 지루하게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붉게 물든 거대한 달이 보였다.

 “달이 진짜 크네.”
 “오늘이 달이 제일 큰 달인데다가, 개기월식까지 볼 수 있대.”
 “그렇군. 그거 알아? 달빛은 인어한테 신비로운 힘을 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다리가 생긴 거야?”
 “글쎄다.”

  아무래도 인어는 낮보단 밤에 주로 활동하거든. 낮에는 인간에게 잡힐 위험성도 크고, 사냥도 쉽지 않아서 모두가 잠든 밤에 움직이지. 제이슨의 부가 설명에 팀이 눈을 반짝반짝 뜨며 인어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졸랐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데미안은 할 수 있는 만큼 다리를 쭉 뻗어 팀의 다리를 퍽 찼다. 물론 팀은 데미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제이슨에게만 몰두했다.

  달과 인어가 아예 상관이 없던 건 아니었나 보다. 데미안은 인어 고기를 먹는 행위의 의미를 돌이켜 생각하다가,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함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마취도 없이 생살을 봉합하는 과정은 버티기 힘들었다. 데미안이 몸을 떨고 있으니 제이슨은 걱정이 되었는지 데미안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정말 다행인 건 라스한테 그렇게 휘둘렸는데도 부러진 뼈 하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찢어진 부위는 봉합하고, 붕대를 감았더니 몸의 대부분이 붕대로 칭칭 감긴 꼴이 되었다. 데미안은 의사가 건넨 진정제를 삼키고 제이슨에게 기댔다. 팀과 제이슨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문득 탈리아의 입에서 팀이 언급된 것을 기억해냈다.

 “너... 우리 어머니와 거래했었군.”

  데미안의 말에 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든 제이슨을 데려오고 싶었거든. 어쩌다 보니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이렇게 손을 잡았지. 내가 네 암살 타겟인 것도 계획의 일부분이었던 거야. 그런데, 어째서 그가 널 에스 알테반에서 내보내고 싶어했는지는 몰라.”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암살 타겟인 것 치고는 너무 접점이 많았다. 팀이 대놓고 들러붙을 때부터 의심해야 했는데, 그때는 이런 상황인 줄 몰랐다. 그리고 오히려 이걸 계기로 그를 회유할 생각이나 했었고. 너무 순진하다고 해야겠지.

  그나저나 탈리아는 왜 팀과 손을 잡고 이런 짓을 벌인 걸까? 그는 데미안이 고담으로 가기를 원한 것처럼 보였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난다 파르밧에서 훈련하기를 원했는데, 고담의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을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일은 데미안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고담에서 제이슨과 함께 살면 되니까. 데미안은 한결 풀어진 태도로 바깥 풍경을 둘러보았다. 개기일식이 끝난 달은 하얀 달빛을 은은히 내뿜고 있었다.

 “나를 데려오고 싶었더라.... 이봐, 티모시.”
 “응? 제이슨.”
 “대체 넌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에스 알테반에서는 데미안을 제외하면 아무도 내 이름을 몰라. 거기다 넌 날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굴고 있잖아.”
 “아, 기억 안 나? 정말로?”
 “그래.” “몇 년 전에, 배트맨이 조커랑 싸우고 있을 때, 인질로 잡혀있다가 바다에 빠졌던 소년 기억나?”
 “뭐?”
 “그때 네가 날 구해줬어!”

  제이슨은 그 당시 상황을 기억해내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딱 한 번, 인질이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제이슨이 급하게 현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 배트맨과 로빈은 조커와 대치하고 있어. 인질을 구하러 갈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GCPD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래도 바다로 곧장 뛰어들기 어려웠다. 현장은 저택과 거리가 멀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케이브와 바닷길이 이어져 있었고 물 속이라면 굉장히 빠르게 헤엄쳐 올 수 있어서, 인질이 물속에서 산소 부족으로 죽기 전 그를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그때 품에 안은 아이가 무척이나 작았는데, 그게 팀이었다니. 제이슨은 놀란 표정으로 팀을 바라보았다.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기도 하는구나.

 “그 꼬맹이가 너라고?”
 “응.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아름다운 인어가 날 껴안고 있잖아. 어떻게 반하지 않겠어?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날 안전한 곳에 두고 바로 도망쳤잖아. 그때부터 네 팬이 되어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었어.”

  한눈에 보고 반했다는 게 그 소리였나? 데미안은 팀과 제이슨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 팔짱을 끼고 대화에 관심 없는 척 시선을 돌렸다. 풍경을 보는 것도 지루했다. 바깥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 장판과 웅장한 달뿐이었다. 매일 에스 알테반에서 보던 풍경이라 식상했다. 이제 데미안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는 것 뿐인데 데미안이 자는 동안 팀이 제이슨한테 뭔 짓이라도 할까봐 신경쓰여서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방금 먹은 진정제가 몸을 급속도로 진정시켰고,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팀의 열정적인 반응에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기분이 좋아 보였던 제이슨은 잠시 후, 조금 망설이다가 나즈막히 물었다.

 “그럼 너도 지금 그, 자경단원이야?”
 “응, 레드로빈이라고, 브루스에게 훈련을 받고 활동하고 있어. 인어를 찾다가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인 걸 알아냈거든.” 

 팀은 방금 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작게 속삭였다.
 

“아, 이거 시크릿 아이덴티티인데, 못 들었겠지?” 

 팀의 시선이 재빨리 데미안을 훑었다. 데미안은 부상을 입기도 했고 라스와 대결하느라 체력을 크게 소모해서 그런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제이슨은 데미안이 불편하지 않게 그를 제 무릎에 눕혔다. 자는 모습이 정말 누구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누굴까, 분명 누구와 닮았는데.

 “...그가 날 기억할까?”
 “당연하지. 아직 네 초상화가 저택에 걸려 있는걸. 딕도 인어 관련 사건이 나올 때마다 너일까봐 매일 적극적으로 수사에 참여하고 있어.”

 아, 맞다. 딕. 팀은 통신기를 너무 오랫동안 꺼놨다는 걸 기억했다. 사실 이보다 더 일찍 헬리콥터에 올라타고 출발하자마자 변조 통신기를 버렸어야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가짜 GPS를 켜놓고 있었다. 이 정도로 GPS가 먹통이 되었다면 딕도 분명히 이상을 눈치채고 팀의 진짜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팀은 변조 통신기를 부숴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고, 기존 통신기의 전원을 켰다. 키자마자 딕의 고함 소리가 이어폰 너머 바깥까지 튀어 나갔다.

 “-팀!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었던 거야!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연락은 안되지, 에스 알테반의 라스 알굴은 갑자기 사라졌지, 지금 당장 배트윙타고 갈 준비까지 끝냈거든?”
 “미안, 딕. 이제 할 일 끝나고 돌아가는 중이니까 가서 설명할게.”
 “-할 일? 역시 너 무슨 의도를 갖고 간 거구나. 정말로 제이슨을 데려오기라도 했어?”
 “음.......”
 “-....젠장. 제이, 리틀윙. 팀이랑 같이 있는 거야?” “끊을게, 딕.”

  팀은 통신을 끊고 제이슨의 눈치를 살폈다. 제이슨은 딕이 부른 옛 별명을 듣고 조금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딕이 제이슨에게 리틀윙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을 때, 제이슨은 “나는 인어지 새가 아니야, 너처럼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어.” 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딕은 인어가 바닷속을 헤엄치는 게 꼭 날아다니는 거 같다고, 그러니 그렇게 부를 거라며 고집을 부렸었다. 리틀윙이라 부를 때마다 무시하고, 화도 냈지만 결국 딕에게 이길 수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불러라.” 라고 패배 선언을 했을 때 딕이 얼마나 크게 웃었던지. 이제는 다리도 생겼으니 리틀윙에 조금 가까워진 셈일까.
  다리는 처음 막 만들어졌을 때보다 많이 익숙해졌다. 암살자들을 만나고 죽지 않기 위해 몸을 쓰다 보니 저절로 걷는 감각을 익혔다. 어쩌면, 배트맨과 같이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이슨은 턱을 괴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지겹도록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과 달이 뒤편으로 물러가고 저 앞에서부터 고층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중간 경유지에 도착할 것이다. 제이슨은 데미안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 잠에서 깨웠다.

 


  팀이 먼저 헬기에서 내리고, 뒤따라 제이슨과 데미안이 내려왔다. 팀은 주위에 매복한 암살자가 없나 면밀하게 주위를 살폈다. 탁 트인 곳이라 갑자기 하늘에서 습격하는 게 아닌 이상, 암살자가 숨어 있기에는 어려운 구조였다. 헬기는 세 사람이 내리자마자 곧장 지체없이 그곳을 떠났다. 헬기 이동 경로가 라스에게 노출된 건 아닌지, 헬기장 주변이 지나치게 황량한 걸 제외하면 큰 위험 요소는 없었다.

  이제 여기서 공항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인데.... 팀은 원격조종으로 개인기가 이곳까지 올 수 있는지 항공 시스템을 조정했다. 어차피 딕한테 들켰고, 브루스는 아직 우주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배트윙을 이용하는 방법도 고려중이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신원불명의 경비행기가 이곳을 향해 오는 걸 발견하고 급히 두 사람에게 알렸다.

 “다들 조심해! 라스가 보낸 정찰부대일 수도 있어!” 데미안은 한참 비행기를 쳐다보더니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저건 어머니의 비행기야.”
 “뭐?”

  탈리아의 개인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경비행기, 그가 가끔 경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세 사람이 중간 경유지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근처까지 왔다는 건 에스 알테반 상황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뒤쫓아올 정도로 정리되었다는 뜻일테다. 경비행기는 데미안과 조금 떨어진 곳에 착륙했고, 데미안의 말대로 문을 열고 탈리아가 걸어나왔다. 팀은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고담까지 나한테 맡긴다더니, 불안해서 그새 쫓아왔어?” 

 “아니, 내 아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탈리아는 데미안에게 다가가 그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치료는 꼼꼼히 잘 되었는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라스가 데미안에게 붙인 추적기가 없는지 살폈다.

 “시간이 많았더라면 자세히 이야기했을 테지만, 지금 그럴 여유가 없구나. 데미안, 잘 들어. 라스... 내 아버지는 널 후계자로 삼으려 했어. 나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지. 내 아들은 리그 오브 어쌔신을 비롯한 지구 전체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널 그렇게 만들 거였어. 하지만 내 아버지는 잘못된 방법으로 후계를 이으려 했단다.”
 “잘못된 방법이라고요?”
 “그래. 아버지는 널 새 그릇으로 삼으려 했어.” 데미안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모자간의 대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조용히 대화를 듣던 팀이 중얼거렸다.


 “와우. 조금 이상하긴 했어. 라스 알굴은 출생 연도로 따지면 100살이 넘었거든. 그의 이름은 옛 문헌에도 나와. 그걸 보면서 어딘가 미심쩍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게 가능하다고?”  제이슨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응. 처음엔 라스 알굴이라는 명칭이 대물림되는 줄 알았어. 하지만 몇 세기 전과 현재 인물이 너무나 똑같은 거야. 그러다 알게 되었지.... 지하에 비밀 연구소가 있다는걸.”

 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온갖 인권 유린적인 실험이 자행되고 있다고 해. 거기서 영생 비슷한 실험도 진행할 거야, 브루스가 거기 데이터를 빼내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맞아, 거기서 인어 배양 실험도 진행중인 걸로 알아.”

 

 인어 이야기가 나오자 제이슨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자세히 말해봐.”

  탈리아는 제이슨과 팀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릇으로 삼기 전에 네가 갖고있는 잠재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클론을 데리고 목숨을 건 싸움을 시켰어. 난 네가 후계자가 될 것임을 알고 있어 이런 훈련 방식에 의심치 않았다. 나도 비슷한 훈련 방식을 겪어왔고, 앞으로 더 혹독한 훈련도 준비되어 있었어. 하지만 계승 방식이 이럴 줄은 나조차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야.”
 
  데미안은 그제야 어째서 라스가 자신의 정체를 노출 시키지 않으려 했는지 알게 되었다. 데미안을 후계자로 공표하기에는 그릇을 빼앗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라스가 터무니없이 강했던 이유도 이거였다. 가장 강하고 젊은 육체로 옮겨가는 것. 오랫동안 살면서 온갖 무술은 다 접했던 라스는 젊은 육체를 금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나만 믿고 있겠다’는 말은, ‘훌륭한 발전을 보여줬다’는 건 그릇으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지고 있다는 뜻이었구나. 데미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난 널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널 이곳에서 빼낼 계획을 세웠지. 가장 좋은 방법은 난다 파르밧으로 가는 거였어. 그곳에 가면 널 지켜줄 아군도 있고, 아버지에게 대적할 힘을 기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넌 점점 더 인어에게 깊게 빠졌어. 인어와 멀리 두면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게 뻔했지. 그래서 차선책인 팀 드레이크와 거래해 그와 함께 고담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단다.”
 “어째서 고담이죠?”
 “그건... 네 아버지, 브루스의 고향이니까. 데미안, 배트맨에게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거라. 팀 드레이크가 그를 만날 수 있도록 도울거다.”
 “브루스 웨인이 제 아버지라고요?”
 “그래. 난 한동안 혼란스러운 리그 내정을 재정립하느라 너와 연락할 수 없을 거야. 내가 준 페스카즈를 소중히 간직하렴.”
 “물론입니다, 어머니.” 데미안의 힘찬 대답에, 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슬슬 가야겠구나. 그전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말하마.”

  에스 알테반에서 내려오는 오랜 청혼 방법이 있지. 상대에게 청혼할 때 목걸이를 선물하는 거다. 목걸이는 일반적인 목걸이가 아니라, 특별한 방식으로 제작된 보석을 매달아야 해. 거기다 잠금장치도 혼자서 차고 벗을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야 하지. 그렇게 상대방이 구혼을 받아들이면 선물한 목걸이를 상대 목에 채워주는 방식이야. 내가 이 말을 왜 하는지 잘 알거라 생각한단다.
  탈리아는 데미안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하고 곧장 뒤돌아 경비행기로 돌아갔다. 데미안은 탈리아가 비행기에 올라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옷자락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시선을 거두고 팀과 제이슨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도대체 내가 인어에게 목걸이를 주는 장면은 언제 본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탈리아랑 눈물의 이별은 마무리했어?”
 “닥쳐.”
 “존재의의를 깨닫고 나니 충격이 심했는지 굉장히 예민해졌는걸.”
 “그만 놀려, 팀. 여기서 이럴 시간 없잖아. 얼른 고담으로 가자고.”
 “맞아!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아서 배트윙을 호출했거든. 금방 도착할 거야.”
 “그거 그렇게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냐?”
 “브루스가 잠시 고담을 떠나있어서. 깨끗하게 사용하고 다시 돌려놓으면 아무도 몰라.”

  팀은 한쪽 눈을 찡긋, 윙크했고 제이슨은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알프레드는 알텐데. 웨인가의 집사, 알프레드 페니워스를 떠올리니 그가 직접 구워줬던 쿠키도 생각났다. 다시 그 쿠키를 먹을 수 있다니. 알프레드를 만나게 되면 쿠키 굽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싶었다. 다시 저택에서 지내게 되겠군. 근데 그러면 데미안은... 제이슨은 데미안이 고담에서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데미안, 넌 고담에 가면 뭐 할거냐? 나야 내 고향이라 익숙하지만, 넌 아니잖아.”
 “난 브루스 웨인을 만나러 갈 생각이야.” 
 “브루스를? 왜?”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그를 만나야 해.”
 “그럼 한동안 같이 지내겠네. 브루스 지금 고담에 없거든.”

  팀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혼자 에스 알테반에 오게 된 이유도, 브루스가 출장을 갔기 때문이야.”

 

 데미안을 대충 고담 어디에 대충 던지고 가고 싶었으나. 제이슨이 데미안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으니 팀으로서는 데미안을 따로 떼어놓고 갈 핑계가 없었다. ‘케이브로 돌아가서 데미안 알굴의 DNA 정보나 입력해야겠군.’ 예비 범죄자 파일은 만들 수 있을 때 만들어야 했다. 내보내기 전에 위치 추적기도 좀 붙여놓고. 그런 생각을 하며 때마침 도착한 배트윙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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