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오아시스 [1]

연성2022. 6. 13. 00:01

<인어슨른 온라인 온리전 Dive Into The Ocean>

뎀슨 / 인어 AU / 슨른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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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이 굉장히 소란스럽다. 데미안은 순간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집중하고, 앞에 서 있는 찰흙 더미를 단번에 베어냈다. 찰흙이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가 났다. 굉장히 빠르고 깔끔하게 베어낸 듯 보이지만 검술 선생이 말했던 기준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검술이었다. 진정한 전사라면 주변에 뭐가 있던 신경 쓰지 않고 목표물에만 신경 써야 한다고 귀에 못이 막힐 정도로 들었는데도 매번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실수를 하고 만다. 망가진 표적을 치우는 내내 어깨 너머로 탈리아와 라스, 클론들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시선들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건 지배자의 그릇인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칼이 무딘 탓이다.


  몇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막 도시 에스 알테반('Eth Alth'eban)과 사막의 지배자이자 앞으로 전 세계를 지배할 최고 권력자 라스 알굴. 데미안은 라스의 뒤를 이을 단 한 명뿐인 계승자였다. 그러니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한번 피어오른 잡생각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환이 필요하다. 데미안은 진흙이 잔뜩 묻은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창가로 움직였다.

 ‘광활하고 혹독한 사막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 통달해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그렇게나 강조하셨지. 하지만 난…….’

  내가 원하는 건….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생각은 그만두고 창문 너머 전경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느 때와 같은 날이다. 흙으로 세워진 건물들 너머로 황금색의 모래 알갱이가 수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강렬한 햇빛을 피해 천막 아래에 숨었다. 어디서 뭐가 이렇게 분주하게 돌아다니는지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도시 입구 근처부터 거대한 모래 먼지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뿌연 먼지 폭풍을 뚫고서 트럭이 줄지어 나타난다. 트럭들은 도시를 지나쳐 더 먼 곳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소음은 트럭이 멀어지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 달 뒤에 에스 알테반에서 1년마다 가장 성대하게 진행되는 축제가 열린다. 표면적으로는 축제라고 표현하지만, 내막은 라스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장치이자 권력을 노리는 반역자들을 잡아들이는 속임수였다. 슬슬 물품을 조달하고 준비를 시작해야 축제 개최 날까지 맞출 수 있을 터였다.
  특히 이번 축제는 슈퍼 블루 블러드 문 (Super Blue Blood Moon) 현상까지 겹쳐 있기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빨갛고 거대한 달 아래서 공연과 만찬이 진행될 동안, 지하에서는 라스가 숙련된 암살자들을 거느린 채 권력을 노리는 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갈 것이다. 데미안은 걸음마를 뗀 이후부터 라스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걸 보고 자랐다. 그의 미래는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라스의 자리를 이어받아 알굴의 권력을 유지해나가는 일이다. 그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가끔 탈리아가 데미안을 보며 가여운 표정을 지을 때마다 미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 홀로 연습을 계속했다. 진흙 인형이 데미안의 검술 스승이라 생각하고 거침없이 공격했다. 스승의 목숨까지 빼앗아야 비로소 모든 걸 습득한, 완벽한 마무리 수업이라 할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칼을 휘둘러대는데,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복장을 살펴보니 탈리아의 하인이 아니라 라스의 직속 호위무사였기에 조금 긴장을 한 채로 상대를 마주했다.

  “도련님.”
  “무슨 일이지?”
  “라스 님의 호출입니다. 궁전으로 오시랍니다.”
  “곧 가지.”

  암살자는 데미안의 답을 듣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궁전으로 가는 내내 의문점이 들었다. 어째서 자길 궁전으로 부른 거지? 그곳은 매스컴 노출 등의 이유로 에스 알테반을 바깥에 노출하는 장소이다. 데미안은 외부에 신분을 노출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후계자임을 들키는 순간 암살의 표적이 되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었다. 거기다 데미안이 10살이 될 무렵, 제왕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섭렵한 후에는 지하에 있는 저택의 메인홀에서 라스에게 암살 의뢰 등의 지하세계 업무를 받아 활동했기에 존재가 들켜서는 안되어 더더욱 신분을 숨겨야 했다. 분명 실존하지만, 실재를 감춰야 하는, 라스 알굴의 그림자. 그런 이유들로 인해 데미안은 궁전에 가려면 몇 가지 변장을 하고 가야 했다.

 


  에스 알테반은 거대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사막 도시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를 그대로 본뜬 듯한 소박한 건축 양식의 건물과 관광지를 중심으로 화려한 중동 문화를 표현하는 궁들로 이루어진 지상과 라스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힘을 토대로 지어진 지하 대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라스 알굴이 만든 암살 집단- 리그 오브 어쌔신과, 전 세계를 상대로 일으키는 범죄 활동은 지하도시에서 행해졌다. 지상 도시는 축제와 마찬가지로 그저 목표물을 불러들이고 남들을 속이기 위한 연극 무대에 불과했다. 데미안은 낡아빠진 후드를 뒤집어쓰고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에 입장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입구 앞에 경호원으로 위장한 암살자들이 참관객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외국의 유명 인사들도 부를 정도로 꽤 큰 행사를 진행하려는 듯했다. 이런 초청 행사가 있었는데도 데미안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여전히 내정에 끼어들 수 없는 신분이란 걸 깨달았다. 내부에는 당연히 알굴 가 관련 사람들이 있을 거다. 가서 데미안을 꼭 닮은 클론들과 만나서 껄끄러운 분위기만 이어질까 봐 입구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데미안처럼 수수한 복장을 차려입은 탈리아가 나타나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이끌었고, 데미안은 괜히 입구 양옆에 장식된 낙타 상을 한 차례 노려보고 그녀와 함께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 가운데에 만들어진 궁전은 사원의 역할도 겸임하고 있기에 굉장히 웅장하고 화려하며, 종교적 색채가 가득했다. 모래밖에 없는 사막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분수가 놓여 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보이는 식물들은 제각기 생기를 뽐내며 정체된 궁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천장을 가득 메운 벽화와 조각상은 얼마나 화려한지 궁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스 알테반이 이렇게나 위대한 도시라는 걸 보여주는 훌륭한 관광 명소였다. 허나 궁전 공사와 관련된 내막을 아는 데미안은 궁전을 둘러싼 모든 게 전부 인위적으로 느껴져 거북했다.

 ‘금칠이 된 벽화 아래로 죽어간 예술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작업이 끝난 뒤에는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어. 그뿐만이 아니지, 궁전 복원 작업에 참가해 이곳의 역사적 의의를 논문으로 집필한 학자들은 지금 알굴의 감시하에 놓여 있지.’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탈리아와 도착한 곳은 거대한 구조물 앞이었다. 새까만 천으로 가려져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었는데, 주의 깊게 살펴보니 수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경호원들이 수조를 빙 둘러싸고 경비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다가, 잠시 후에 라스가 나타나 연설대 앞에 서서 인파들을 둘러보았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다. 데미안은 라스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슬쩍 웃었다고 생각했다. 라스는 여유롭게 카메라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다가 곧 그만두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장내가 안정된 후에는 허공에 손짓을 했다. 궁전을 밝히던 불이 꺼지고 그에게 조명이 집중되었다.

  “우리 에스 알테반은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 라자러스 핏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데 라자러스 핏에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는 건 모르셨을 텐데요. 아주 오래전, 지구가 갓 탄생했을 적 바다에서 다양한 생명체가 생겨났죠. 그중 하나는 신비로운 힘으로 바다를 지배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육지란 게 생겼고,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등장했습니다.”

  몇 마디 만에 관객들의 시선이 라스에게 집중되었다. 역시 그의 언변은 이목을 끄는 힘이 있었다. 거기에 라스의 뒤에 깔린 조명이 현란하게 바뀌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데미안은 이런 이야기를 난생처음 들었다. 시선을 살짝 올려 탈리아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듯 별다른 반응 없이 턱을 괸 채 수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바다의 지배자인 동시에 굉장한 탐험꾼이었습니다. 미지로 가득한 육지로 떠나자고 결심하고, 출발하기 전에 자신의 힘을 담은 펜던트를 바닷속에 던지고 떠났습니다. 이후 영겁의 시간이 지나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메말라 사막이 되었지만, 그것의 힘이 담긴 펜던트 주변은 항상 생명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이 라자러스 핏이라 불리는 겁니다.”

  데미안은 팔짱을 낀 채 에스 알테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라스를 바라보았다. 극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즉석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조부님께서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요.”
 “뭣 모르는 사람들에겐 저런 과장된 이야기가 통할 때가 있단다. 거기다 사실 여부는 둘째치고 저건 진짜 존재하는 전설이야.”
 “말도 안 돼.”
 “이 세상엔 네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아들아. 곧 그걸 경험할 수 있을 거야.”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라스 뒤에 있는 거대한 수조에 시선을 집중했다.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고기인가? 독특한 취향을 가진 라스라면 심해생물을 데려왔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라스의 이야기는 딱히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고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

 “펜던트는 지금도 라자러스 핏에 가라앉아 우리에게 물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그 생명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라스는 말소리가 줄어드는 걸 기다리다가, 마침내 천을 젖혀 수조를 공개했다. 라스에게 집중된 조명이 바로 수조로 몰려들었다.

 “그건 바로, 멸종위기종으로 알려진 인어입니다! 그 중에도 붉은 인어는 고급 개체로 알려져 있죠. 최근 5년 동안 난획으로 인해 인어의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데미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곧바로 뒤에서 카메라 연사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수조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그것은 새빨갛게 빛나는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인어였다. 비늘은 강렬한 빨간색이었지만 조명이 비치면 오색찬란한 색깔로 변했다. 인어가 움직이면서 목에 걸린 푸르스름한 펜던트도 같이 반짝였다. 웬만한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인어는 수조가 낯선지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그러다 수조 벽을 짚고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수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수조 내부를 볼 수 있었지만 수조 안쪽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어의 눈은 보석으로 이루어졌나? 유난히 다른 것들보다 반짝임이 더 돋보이는 건 데미안의 착각이었을까. 한참 벽을 콩콩 두드리던 인어는 이내 포기한 듯 어느 바위에 앉고 눈을 감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그 모습 자체로 명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답다. 데미안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선홍빛 지느러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 속이라 그런지 머리카락이 흐느적거리는 것도, 촉촉하게 젖은 피부도 전부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상체에 드문드문 비늘이 돋아있는 것도 너무나 예뻤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너무 세차게 뛰어서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 나간 게 아닌지, 가슴 부근을 손으로 더듬을 정도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어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인어를 공개하고 나서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어떻게 인어를 데리고 있는지, 인어는 물이 필요한데 이 사막에서 어떻게 키울 건지, 저 인어가 착용한 펜던트가 전설에 나오는 펜던트인지 등등. 라스가 그런 질문을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 질문들이 모여 라스에게 당위성을 부여해준다. 그는 여유가 가득한 표정으로 하나씩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인어는 해변에서 우연히 만났으며, 라자러스 핏은 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물이 마른 적 없는 오아시스이므로 이 물을 이용해 인어를 데리고 살 거다. 펜던트는 물론 진짜다. 인어는 발견 당시 전신에 상처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불법 포획에 납치되었다가 가까스로 도망친 개체로 보이며, 이곳 에스 알테반에서 그를 보호하려 한다. 그리하여 라자러스 핏은 펜던트의 주인, 인어와 함께 에스 알테반에 저물지 않는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다.
  라스의 의중은 마지막 대답에 담겨 있다. 절대적으로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인어를 키운다는 의미는 그만큼 충분한 재력이 있고 메마르지 않는 오아시스- 라자러스 핏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행위이다. 거기다 인어를 보호한다니,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라스가 얼마나 부자인지 지구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이러는 이유는, 그런데도 라스의 자리를 넘보는 반역자들이 항상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지금도 라스에게 얼마를 줄 테니 인어를 팔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은 여길 무슨 경매장으로 착각하고 있나 보다. 물론 라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저런 이들이 한순간 유혹에 빠져 주변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눈앞의 욕망만을 좇아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다.

 “처음 보는 생물이니 계속 눈이 가겠지. 하지만 명심하렴, 데미안. 저건 네 것이 아니야.”
 “...알아요, 어머니.”
 “그럼 이만 가자꾸나.”

  데미안은 방금 한순간이었지만, 그들처럼 라스의 자리를 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에스 알테반의 모든 물자는 라스의 것이다. 그게 당연하고 앞으로 그걸 물려받게 될 거라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인어를 본 순간 데미안의 세계가 세차게 흔들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데미안은 산책하다 우연히 들어온 척, 조용히 궁전으로 들어왔다. 저녁에는 관광객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따로 변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궁전은 어쩐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괜히 경비병을 만나면 귀찮게 추궁당할 거 같아서 그들을 피해 조용히 움직였다. 경비원들의 순찰 경로를 파악한 후 빠르게 수조 앞까지 도착했다. 수조 안에는 인어가 쉴 만한 작은 은신처가 놓여 있었으나 영 불편한지 몸을 웅크린 채 물속에 가만히 떠 있었다. 졸린 걸까? 아니면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 하는 걸까?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크게 불러 이목을 끌지 않고 소통하는 방법은 이것 말고 없었다. 그는 수조 벽을 쿵 쳤다.

 “...?”

  인어는 진동을 느끼고 바로 깨어나 수조를 한 바퀴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뒤 허공을 향해 뻐끔뻐끔 거품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런 비좁고 불편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은신처라고 만들어준 건 무슨 창고로 쓰기도 아까울 정도로 허접한 플라스틱 덩어리다. 볼수록 화가 나서 은신처를 덩어리로 쪼개놓으며 화를 풀었다.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고,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다시 수조를 둘러보았다. 좋게 보려고 했지만 좋게 볼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수조 벽에 여러 차례 몸을 부딪쳤지만, 수조 설계자가 인어 몸의 강도를 잘 알고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다가 죽겠군. 유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펜던트를 꽉 쥐었다. 환경이 바뀌어도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화를 내봤자 이곳에 갇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쓸데없이 체력을 낭비하지 말고 비축하고자 억지로 잠을 자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그는 다시 한번 아주 작은 진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수조 안쪽은 바닷속을 그린 그림으로 꾸며져 있어 바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진동은 저기서부터 퍼졌다. 그는 천천히 헤엄쳐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인어는 벽을 쾅 쳤지만 완벽한 충격 방지 설계로 인해 진동이 생기지는 않았다.

 “젠장, 거기 누구 있어?” 

 건너편은 고요했다. 인어는 몇 차례 더 고함쳤지만 보글보글 거품만 올라왔다. 주위는 온통 침묵뿐이었다.
 
  데미안은 인어가 가까이 다가오자 숨을 들이마셨다. 가까이서 본 인어는 정말 위압적이고 황홀했다. 눈은 바다의 푸른색을 그대로 옮겨 담은 색깔이었고, 사파이어가 박힌 듯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반짝거렸다. 거기다 헤엄칠 때 나오는 우아함과 유연성은 인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인간과 같은 상체에는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잡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데미안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풍만한 가슴이었다. 원래 인어는 다 저렇게 가슴이 큰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데미안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고,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욕망덩어리는 겨우 한 줌에 불과했지만 언제든 이성을 잡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어는 데미안의 두드림을 듣고 반응하여, 수조 앞으로 다가와 벽을 쾅쾅 내리치고 뭔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데미안은 인어가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인어를 키우기 위해 수조 내부 소음이 밖으로 노출되지 않게 특수 설계가 적용된 듯했다. 데미안은 계속 수조를 두드렸지만, 인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수조 안쪽으로 들어갔다. 인어는 다시 아까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가만히 있었다. 데미안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궁전을 빠져나갔다.

 


  지하도시로 돌아와 몇 시간 동안 진행되는 무술 훈련을 마쳤다. 이 훈련을 마치면 라스가 따로 의뢰를 주지 않는 이상 잠들기 전까지 자유시간이었다. 이때, 클론을 만나면 대련하자고 달려들게 뻔하다. 에스 알테반의 지하 연구소에서 탄생한 클론들은 데미안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걸 과시하고 ‘데미안’의 이름을 받기를 원했다. 항상 호전적이기에 대련을 시작하면 누가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았다. 데미안은 누구도 만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고 서재로 달려갔다. 그리고 빠르게 궁전 설계도를 찾아서 품에 들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펼쳤다.


  인어도 결국 생명체이기에 음식을 먹어야 한다. 거기다 수조는 바다와 다르게 물이 순환되지 않기 때문에 따로 여과기와 펌프를 설치해 물이 고이지 않고 순환되도록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어딘가에 수조와 연결된 통로나 장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어를 전시한 1층에는 그런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지하나 2층에 해당 장치를 설치했을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지하와 2층도 보통의 방법으론 접근할 수가 없었다. 고위관리직만 아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설계도에서 통로를 찾으려고 했는데, 당연하게도 지하 연결통로는 지워져 있었다. 궁전이 개방적인 공간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그곳도 암살용으로 사용하는 장소이다. 거기다 2층과 지하는 암살을 준비하기 위한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어 그렇게 만들어놓은 듯했다. 이럴 줄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온건데. 데미안이 리그 오브 어쌔신에서 힘이 있었다면 수족을 부려 알아냈겠지만, 아직 그의 자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고 가냘팠다.

 “그러니까 여길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문제인데…….”

  데미안은 문득 자기가 인어에게 너무 사로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맹목적인 관심은 좋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먹이를 어떻게 주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인어를 보고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어? 아직 사랑인지,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데미안은 그걸 갖고 싶었다. 언젠가 라스에게 물려받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고 그 전에 인어가 죽어버릴지도, 데미안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인어의 목소리가, 그 지느러미의 촉감이, 그의 피부가 너무 궁금했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이성이 차갑게 내리눌렀다. 정신 차려. 지금 네 위치를 알아야지. 탈리아와 라스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호통을 쳤다. 그렇다. 지금 인어한테 관심을 줄 때가 아니다. 불안정한 자리를 견고히 다지고 후계를 이어받을 생각을 해야지. 지금 당장 클론이 방에 침입해서 심장을 꿰뚫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설계도는 내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훈련에 집중해야겠다. 인어와 궁전의 근처도 가지 않겠어.

  그렇지만 항상 그렇듯, 운명은 데미안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클론들은 불시에 데미안을 습격했다. 한동안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의 신음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주위가 조용해지고, 시체 더미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집어 든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날을 따라 선혈이 주륵 흘러 땅에 뚝뚝 떨어졌다. 칼에 베인 자리에서 피가 솟구쳐 흐르며 데미안과 방을 덮쳤다. 데미안의 발밑은 클론들의 피로 한참 전부터 피 웅덩이로 젖은 채였다. 방 여기저기에 그의 얼굴과 똑 닮은 소년의 머리가 널려 있다. 처음에는 제 복제품을 죽인다는 거에 거부감이 들었다. 몇 번이고 꿈에 나와 데미안에게 네 미래의 모습이라고 달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하도 많이 죽여서 이제는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생명을 잃고 죽어버린 클론의 얼굴,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라스가 손뼉을 치며 나타났다.

 “훌륭해. 기대 이상의 발전을 보여줬어.”
 “감사합니다, 조부님.”
 “앞으로도 너만 믿고 있겠다, 데미안.”
 
  라스는 데미안의 어깨를 툭툭 쳤고, 데미안은 고개를 숙였다. 라스가 떠나고 뒤이어 시종들이 들어와 피로 더럽혀진 복장을 벗기고 깔끔하게 다려진 정복을 입혔다. 데미안은 곧장 피비린내 나는 창고를 떠났다.
  그는 수십 명의 클론을 죽였다. 오늘 전투 데이터를 토대로 내일 한층 더 AI가 업그레이드되고, 이를 삽입한 클론이 생산되어 언제든지 데미안을 죽일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낸다. 그리고 데미안이 방심한 틈을 타 그를 습격하고, 데미안은 다시 클론을 죽였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오늘 클론에게 급소를 찔릴 뻔했다. 자칫하면 죽을뻔했는데, 인어가 보고 싶을 때마다 혹독히 수련에 매달려서 그랬는지 간발의 차로 재빨리 피하고 빈틈을 발견하자마자 급소를 찔렀다. 점점 성장한다는 게 느껴져 조금 뿌듯했다. 역시 수련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하는데 문득 인어가 보고 싶었다. 녹색 알굴 정복을 입은 인어. 분명 잘 어울릴 텐데. 데미안은 궁전이 있는 방향을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 지하여서 다행이지. 지상이었다면 당장 인어를 보러 뛰쳐나갈 뻔했다. 젠장, 인어는 인간을 끌어당기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었나보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이 오길 기다리는데. 탈리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따라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데미안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어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들을 보러 오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니. 그건 그렇고, 오늘 훌륭히 네 능력을 발휘했더구나.”
 “후계자로서 수련에 힘쓴 덕분이죠.”
 “그래, 아버지도 네 시합을 감명 깊게 본 모양이더구나. 자, 새로운 의뢰야.”

  탈리아는 데미안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태블릿 안에는 암살 타겟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팀 드레이크-웨인. 미국인. 17세. 고담 태생. 고담의 지주 브루스 웨인의 양아들. 몇 주 후 열릴 축제에 귀빈으로 참석할 예정. 라스가 그에게 몇 가지 회유책을 건넬 건데, 그가 응하지 않으면 바로 위험인물로 처리해야 함. 장소는 이곳 에스 알테반 정궁. 데미안은 무표정으로 앞을 응시하는 팀 웨인의 증명사진을 기억했다. 그 외 이것저것 다양한 정보들이 적혀 있었으나, 암살에 있어 필요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스크롤을 아래로 쭉쭉 내렸다.

 “예정일은 연회가 있을 축제 마지막 날이야. 상황에 따라선 암살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니 신호를 기다리도록 해.”
 “이 녀석은 누군데 조부님과 만나는 거죠?”
 “위대한 계획 중 일부라고 해둘게.”

  더는 캐묻지 말라는 뜻이다.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리그 오브 어쌔신이 데미안에게 요구하는 건 세계를 지배하고자 세워진 위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데미안이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이유도, 의뢰 이외의 목적으로 에스 알테반을 떠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데미안과 다른 암살자들은 해당 명령에 대해 의문을 품지 말고 수행해야 했다. 이에 단 한번도 의구심을 품은 적이 없었는데, 괜히 반발하고 싶은 건 어째서였을까.

 “네게 궁전 2층 접근 권한을 주마. 네게 필요할 거야.”
 “네, 어머니.”

  탈리아에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실히 듣고, 데미안은 태블릿은 대충 침대 위로 던져두고 조용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방식으로 2층에 들어갈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간신히 마음속 밑바닥에 재워뒀던 바람, 인어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쳐 올랐다. 눈을 감으면 인어가 붉은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모습이 선명히 그려진다. 다른 사람들 몰래 종이에 인어를 그린 그림도 몇 장이 넘어간다. 그날은 설레는 맘을 진정시키지 못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궁전 1층을 둘러보다 보면, 알 굴가의 역사가 담긴 기다란 벽화를 발견할 수 있다. 벽화의 어느 부분을 정해진 순서대로 누르면 숨겨진 문이 나타난다. 벽화였던 부분이 문으로 바뀌며 2층으로 가는 길이 드러났다.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갔다. 외부인에게 노출된 1층과 달리, 2층은 어둡고 공기가 무거웠다. 어둑어둑한 조명이 데미안을 반겼다.
 이곳에는 저번에 수조를 공개할 때 활용했던 조명들과 인질을 붙잡아놓거나 살해하기 위한 여러 물품이 놓여 있다. 생포한 인질을 불가피한 이유로 살려둘 때, 그동안 중요한 정보가 유출될 수 있어서 대기 장소로 이곳을 활용했다. 인질을 불러오기도 좋고, 방음/방수도 완벽하고, 시체를 처리하기에도 적절한 장소. 지금까지 즉결처분만 해왔던 데미안에게는 조금 신선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건 그렇고, 수조와 연결된 장치는 어디에 있을까? 1층 구조를 생각하며 2층을 돌아다녔다. 개방된 구조의 1층과 달리 2층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다 숨겨진 방도 있어서 하나씩 살펴봐야 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수조가 보이는 방을 찾았다. 콘크리트로 구성된 다른 방과 달리, 이곳은 색감 있는 타일이 장식되어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수조와 일반 공간을 분리하는 두꺼운 쇠창살이 놓여 있었다. 쇠창살 너머로 표면이 출렁이는 게 보였고, 물비린내가 났다. 쇠창살에 가까이 다가가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인어가 사는 수조 내부를 비스듬하나마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인어에게 먹이를 주고, 그가 도망가지 않고 계속 여기서만 살 수 있도록 적절히 환경을 조성하는 듯했다.

 ‘여기서 저기까지 내 목소리가 들릴까?’ 

  인어를 부르기 전에 고민이 되었다.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냥 인어라고 부르면 알아들을까. 야, 라고 불러버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아래에 물이 출렁이더니 인어가 튀어나왔다. 데미안이 인어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갖고 있는 것과 별개로, 인어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주위에서 살기를 느껴 뒷걸음질 치면서도 인어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넌 누구야?”
 “…….”
 “나한테 밥 주는 사람은 아닌데.”
 “난… 데미안 알굴, 에스 알테반의 정당한 후계자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거니까. 
 “뭐, 어쨌든 높으신 분이라는 소리군. 여긴 왜 왔어? 1층에서 내가 멍청하게 헤엄치는 걸 구경하는 거로는 부족했나?”
 “아니야! 난, 그냥 널 더 알고 싶어서…, 그래서 찾아왔어.”

  인어의 목소리는 데미안이 상상했던 목소리보다 좀 더 거칠다. 말투도 껄렁하고. 막연하게 신비롭고 신성한, 전설적인 존재라고 기대했는데 한번 대화를 나눠보니 조금 예민한 성정을 가진 청년일 뿐이었다. 수조 안쪽, 물속에 있을 때 피부가 굉장히 반짝거렸는데 물 밖에서도 그런 걸 보니 그냥 인어 피부 특징 중 하나인가 보다. 어둠 속에서 인어의 푸른 눈이 잔잔히 빛났다. 푸른 안광을 보며 인어란 확실히 인간과 다른 개체란 게 몸소 느껴졌다.

  데미안은 찬찬히 인어의 이목구비를 살펴보았다. 촘촘하게 박힌 속눈썹이 팔랑거린다. 인어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야생동물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제법 살기가 담긴 시선이었다. 그는 데미안이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시선만 주고받았다.
 인어가 라스의 전리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으니 주어진 임무에 집중하면 되는데, 화르륵 타오른 호기심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고 대신 호기심이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

 “넌 이름이 뭐지?”
 “알아서 뭐 하게?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는 내 이름을 발음할 수 없어.”
 “계속 물고기라 불리고 싶나 보군. 아니면 내가 친히 지어줄 수도 있어.”

  인어는 데미안 쪽으로 물보라를 뿌렸다. 데미안은 인어의 시비를 가볍게 무시하고, 뒷짐을 진 채 그가 이름을 말하길 기다렸다. 이대로 인어와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할지, 아니면 사이를 진전시킬 수 있을지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인어는 데미안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얼마 있다 한숨을 쉬고 순순히 이름을 말했다.

 “---.”
 “뭐라고?”

  그건 언어라기보다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짧은 소절이었지만 굉장히 감미롭고 현혹되는 말투였다. 뭐라고 발음하는 거지? 감히 따라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데미안은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잊고 벙찐 채로 인어를 바라보았다. 데미안의 반응에 인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네 언어로 표현하면, 제이슨 토드야.”
 “생각보다 인간적인 이름이군.”
 “우리 사회도 인간 사회랑 별다를 거 없어. 사실, 인간들은 인어를 단지 말하는 물고기라 생각하는데, 우린 그거보다 훨씬 진화한 종족이야.”

  제이슨은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팔짱을 끼며 가슴이 모아져 저절로 골이 생겼다. 진짜 무슨 가슴이 저렇게…. 데미안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 거 치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잡혔다고 들었는데.”
 “그건… 내 실수야. 잠시 햇볕 쬐러 올라왔는데 습격당할 줄은 몰랐어.”
 “해변에서 데려온 건 맞군. 다친 곳은?”
 “난 멀쩡해. 나 말고 날 데려가려고 습격한 놈들이 더 문제일걸.”

  라스가 한 말 중에, 해변에서 데려왔다는 건 순 거짓말이고 어디 연구소에서 강탈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쳤다는 것도 거짓말이었군. 애초에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게 아니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라스는 오랫동안 인어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인어가 언제 어느 해변으로 올라오는지, 어떻게 해야 흠집 없이 인어를 납치할 수 있을지 통계를 내어 가장 최적의 방법으로 데려왔겠지. 그냥 데려오면 불법 포획이니, 다친 인어를 보호한다는 명목도 함께. 어쩌면 지하 연구소에서 인어 DNA로 모조품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했는데 의외로 그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지, 앞으로 그렇게 인조 인어가 탄생할지도.

 “그래. 나한테 밥 주는 녀석은 한마디도 안 해서 답답해 죽을 뻔했는데, 이제 좀 대화가 가능한 녀석이 오네. 여긴 어디야? 에스 알테반이 뭔데?”
 “이곳은 광활한 사막에 세워진 영광의 도시 에스 알테반이다. 그리고 난 네 주인이나 다름없으니 예의를 갖추도록 해.”
 “뭐? 사막? 물 하나 없는 메마른 땅? 맙소사, 멀리도 왔군. 근데 그럼 물이 부족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물을 독차지해도 되냐? 설마 날 인어육포로 만드려고?”
 “…넌 축복받은 오아시스, 라자러스 핏 덕분에 여기서 물 걱정 없이 생활 할 수 있어. 우리 또한 마찬가지지. 이런 곳에서 살 수 있게 된 걸 감사히 여기라고.”
 “오…. 거참 멋지네.”

  제이슨은 데미안의 태도를 일부러 무시하는지 아니면 호기심이 넘쳐흘러서 그러는지 헷갈릴 정도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데미안이 몇 번 헛기침하며 분위기 환기를 한 후에야 ‘아, 맞다. 왕자 앞에서 예의를 갖춰야지. 암, 그래. 나도 왕자 나오는 동화책은 읽었다고.’ 하며 데미안을 ‘왕자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왕자가 아니라 후계자인데, 왕자라고 부르는 인어의 목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아서 내버려 뒀다. 인어는 말을 하는 족족 빈정거림을 숨기려는 기색 따위 보이지 않았지만, 뭐라 지적을 해봤자 들어먹지도 않을 거 같아 그냥 잠자코 있었다.
  에스 알테반에 대해 추가적인 질문이 이어진 후, 인어는 잠깐 수조로 내려가 모습을 감췄다. 데미안은 이제 인어와 대화는 끝인가 싶어 문을 열고 돌아가려는데, 첨벙 소리가 들려 움직임을 멈췄다. 제이슨은 여전히 철창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채였다.

 “왕자님,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
 “무슨 내용이냐에 따라 다르지.”
 “여기 수조 바깥에 내가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린 물고기처럼 온종일 물속에서 생활하지 않아. 가끔 밖으로 나와서 공기 호흡도 한다고. 햇볕도 쬐어야 하고…. 그리고! 저 아래는 사방이 막혀서 너무 답답해.”
 “바라는 게 많군.”
 “인어를 키우려면 이 정도 각오를 했어야죠, 왕자님.”
 
  데미안이 뭐라 대꾸를 하려 했지만 이미 인어는 물속으로 도망친 뒤였다. 정말이지, 인어란 족속은 저렇게 다 버릇이 없는 건가. 데미안은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다 혀를 차고 문을 열어 2층에서 빠져나갔다.
  제이슨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다. 인어는 한결같이 건방졌고, 그게 데미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갇혀 있는 신세인데도 비굴해지지 않고 상대와 동등한 위치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데미안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인어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데미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라스가 인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았지만 다가가도 좋다고 허락한 적도 없다. 인어의 식사를 챙겨주는 하인이 탈리아 소속이라면 모를까. 불편한 마음을 담고 침실로 돌아와 자기 직전까지 인어 생각을 하며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데미안이 인어를 찾아간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그동안 후계자 수업을 듣고, 평소처럼 달려드는 클론을 정리하고 대외 활동까지 처리하느라 인어를 찾아갈 시간이 나지 않았다. 겨우겨우 수업을 마치고 의뢰도 성공하고 거치적거리는 클론도 전부 죽여버린 후, 궁전 2층으로 가 수조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인어가 하인에게 강력하게 주장을 했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며칠 못 본 새에 인어의 보금자리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2층 출입구와 수조 사이가 철창으로 구분된 건 여전했다. 1층 수조에선 천장, 2층에선 바닥에 해당하는 부분을 공사하고 거기다 은신처를 설치해 인어가 수조에서 올라와 지면에서 쉴 수 있도록 했다. 거기다 인공조명이 설치되어 건물 안이지만 바깥에서 햇빛을 보는 듯한 느낌을 내었다.

 “안녕, 왕자님. 언제 오나 한참 기다렸어.”
 “날 기다렸다고?”
 “응. 나랑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너뿐이잖아.”

  인어는 데미안에게 경계심을 풀었는지 먼저 밝게 인사했다. 인어에게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서 조금 기뻤다. 데미안은 얼굴을 살풋 붉혔다. 제이슨은 은신처에 편안히 앉아 있다가, 돌연 표정이 안 좋아지더니 물속으로 들어가 철창 가까이,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그는 데미안을 빤히 쳐다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왕자님, 어디 다쳤어?”
 “아니.”
 “근데 왜 이렇게 피 냄새가 진동을 하지….”

  제이슨은 계속 코를 킁킁거렸다. 데미안은 몇 시간 전 클론 무리를 해치우고 왔던 걸 떠올렸다. 피 냄새가 나지 않게 꼼꼼히 깨끗하게 씻었는데도 몸에 조금 배어  버린 듯 싶었다. 인어의 후각이 예민한 걸까, 아니면 암살자인 자신이 피 냄새에 너무 무뎌져서 맡지 못하는 걸까.

 “다친 게 아니라면 됐어. 원래 인어가 후각이 좀 예민해. 특히 피냄새에.”
 “상어처럼?”
 “비슷해. 그거 알아? 인어는 바닷속 먹이사슬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지. 상어도 내 간식이란 소리야.”
 “그건… 처음 듣는 소리군.”
 “설마 인어가 해조류나 조개만 먹는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아, 무리도 아니지. 인간들은 인어를 그저 관상어 취급하니까. 심해에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때론 상어 이빨도 깨뜨릴 정도로 단단한 게 인어야.”
 “그렇게 강한 존재인 것 치곤, 인간에게 너무 쉽게 당하는 듯 한데.”
 “그건... 환경이 달라서 그래. 물이 없는 여긴 우리에게 너무나 불리하다고. 너희의 무기가 바닷속에선 통하지 않는 것과 같아.”

  인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말은 흘려 듣고, 홀린 듯이 팔을 뻗어 축축한 제이슨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머리카락의 감촉은 그냥 사람과 다르지 않다. 제이슨은 데미안이 제 말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어린애가 실컷 제 머리를 만지고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잠시 고담에 살 적에, 자신을 이렇게 쓰다듬어주던 사람이 떠올랐다.


  여긴 참 이상한 곳이었다. 제이슨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수조뿐이었는데, 이 수조 위아래 전부 바깥이랑 완전차단되어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여기에 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은신처를 만들어주고 밥을 맛있게 달라는 등의 투정은 다 들어줬는데 바깥을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는 전부 무시로 일관했다.
  가끔 찾아오는 어린애한테서는 역한 피 냄새가 질질 흐르고, 식사를 챙겨주는 주는 애는 무슨 닌자처럼 조용히 나타났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도대체 여긴 뭐 하는 집단이야? 인어의 능력으로 탈출 방법을 모색하고 난동을 피우려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제이슨은 왕자라고 이야기한 녹색 눈의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보다 보니까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얼굴이었다.

  소년의 손이 머리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신기한 듯 인어의 볼을 쿡쿡 누르다가, 이내 아래로 내려와 목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성인이었다면 가차 없이 손을 물어뜯었을 텐데, 아직 어린 왕자님이라 봐줬다. 그리고 데미안의 손길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쁜 의도를 갖고 건드리는 게 아니었기에.

 “이거… 펜던트는 우리가 준건가?”
 “어? 아니. 유품…같은 거야.”
 “전설의 펜던트 따위가 아니었군.”
 “그건 또 무슨 만화 같은 소리야?”

  데미안은 제이슨에게 라스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말했다. 라자러스 핏과 펜던트에 얽힌 설화를 듣고 난 후 제이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절대 이 목걸이를 벗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딴 이유였군.”
 “유품이라고 했지. 네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아마도?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행방불명이었어. 죽었겠지.”

  제이슨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인어는 굉장히 독립적인 개체다. 개중에는 서너명씩 함께 다니는 이들도 있지만, 그 경우가 유별난거고, 대부분 홀로 생활했다. 무리를 지어 활동하지 않아도 충분히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고, 심해든 얕은 물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가족의 정이란 걸 느낄 새도 없이 홀로 버려졌다. 인어의 첫 기억은 외로움이었다. 눈보라가 매섭게 불던 밤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고층 건물을 보며 혼자서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가자고 발버둥 치던 어릴 적이 생각났다.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은 거 같네, 꼬마 왕자님. 저번에 수조 벽을 쿵 친 것도 너였지?”
 “그래. 나야.”
 “내가 널 잡아먹을 수도 있는데. 내가 무섭지 않아?”

  제이슨은 입을 벌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를 거침없이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들.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섭다기보다는… 너무 예뻐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이 감정은 처음 인어를 봤을 때부터 여전했다. 인어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함께 지내고 싶었다. 인어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냥 제이슨 토드라는 사람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 이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서 때론 답답했다. 인어에 관한 옛 기록을 보면 뱃사람이 인어를 보고 홀려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하던데, 그게 이런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만 가봐야겠어.”
 “즐거웠어, 왕자님. 아! 잠깐,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뭐?” “책 하나만 가져와 줄 수 있어? 좋아하는 책이 있거든.”
 “너 말야… 내가 왕자인 걸 자각을 하고 있긴 해? 날 무슨 하인 취급하는 거 같군.”
 “당연하지. 그리고 날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도 알아.”
 “…….”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고 가버렸지만, 다음번에 만날 때 책을 가지고 올 걸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인어는 까만 뒤통수를 생각하며 은신처로 돌아갔다. 스스로 도망쳐 나온 곳, 고담이 오늘따라 무척 그리웠다. 데미안의 행동이 그곳에서 만난 누군가를 자꾸만 떠오르게 만들었다. ‘거기서 오만과 편견을 처음으로 읽었었는데.’ 제이슨은 기억을 더듬어 어릴 적 누군가가 불러준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데미안은 서재에서 몰래 챙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오만과 편견. 이런 책이 도서관에 있는 줄도 몰랐다. 소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단 전공 서적을 자주 챙겨 읽었고, 그마저도 신체 훈련 때문에 독서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도 빌려 가지 않은 듯 깨끗한 책을 펼쳤다.


   라자러스 핏은 다른 오아시스처럼 모래바닥에 물이 고여있는 형태가 아니라, 거대한 지하 동굴의 구덩이에 물이 차올라 있었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묘한 청록빛을 발산하는 핏을 볼 수 있었다. 에스 알테반의 주요 수자원인 만큼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라스와 데미안, 탈리아와 몇몇 고위 간부뿐이었다. 거기다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해 경비를 한층 강화한 상태인데 이곳에서 낯선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항상 소지하고 있는 단도를 손에 쥐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침입자를 마주했다.

 “토드?!”
 “어, 왕자님이네? 안녕.”
 “여기서 뭐해! 어떻게 수조에서 탈출한 거지?”
 “그냥 땅 파고 왔는데.”

  제이슨은 라자러스 핏에서 태연히 헤엄치며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데미안에게 팔을 흔들며 인사했다. 설명을 듣자 하니, 수조 아래에 있는 은신처 구석의 바닥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걸 발견했다. 마르지 않는 샘인지 뭔지가 궁금했고, 무엇보다 심심해서 단순무식하게 바닥을 뜯었다. 인어가 바닥을 파헤치리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따로 막아놓은 게 없어 그는 수월하게 수조에서 탈출했고, 물을 거슬러 올라왔더니 이곳이었다. 데미안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당장 돌아가. 여긴 신성한 곳이야!”
 “뭐 어때. 어차피 식용수로 사용 불가능한 물이던걸. 온갖 미생물이 좋다고 뛰어다니고 있거든? 어차피 너희들이 마실 땐 몇 차례 정수 과정을 거칠 테니 괜찮잖아.”

  인어들은 다 이렇게 막무가내인가? 인어 따위가 핏을 더럽혔다는 걸 라스가 알면 희귀종이고 뭐고 곧장 죽여버릴 게 분명했다. 데미안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슨은 여유롭게 핏에서 첨벙첨벙 수영했다.

 “젠장, 조부님이 아시면 큰일 나!”
 “알겠어. 알겠다고. 꼬맹이가 걱정하니 얼른 가야지.”

  그래도 여기서는 바깥이 보일 줄 알았는데, 돌밖에 없네. 제이슨은 혼자 중얼거리고 첨벙 소리를 내고 사라졌다. 제이슨이 완전히 돌아간 걸 확인하고 나니 뒤늦게 라스가 들어왔다. 평소보다 긴장한 기색의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순찰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며. 제이슨이 떠나가며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 몰래 2층 통로를 통해 인어를 찾았다. 제이슨은 자는 듯 작은 숨소리만 들렸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
 “바깥을 보고 싶었던 건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왕자님. 넌…”

  눈을 본 적이 있어? 제이슨의 물음에 데미안은 곰곰이 생각했다. 새하얀 눈. 사시사철이 고온 건조한 사막에서 눈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아주 가끔 해가 가라앉은 밤에, 습도에 따라 얇은 눈이 모래 위에 쌓이는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굉장히 드문 일이고, 아침이 되면 뜨거운 햇빛에 속절없이 녹아버렸다.

 “난 눈이 내리는 겨울 밤바다에서 깨어났어.”

  이상하게도 그 이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제이슨이 기억하는 건, 새까만 바닷속을 등지고 수면을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겨우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 얼굴에 눈송이가 닿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눈보다 바닷물이 훨씬 더 차가울 텐데, 어째서인지 코에 닿아 사르르 녹아내린 눈이 굉장히 차디찼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눈들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점이 그렇게나 부러웠다. 가까이에 있는 바다는 너무나 새까맸고,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은 반짝반짝 환하게 빛났다. 저 건물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밝은 곳으로, 홀로 어두운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도시와 가까워지려고 두려움을 참고 용감하게 까만 바닷속으로 들어가 빠르게 움직였지만, 아직 지느러미가 연약해서 오랫동안 헤엄칠 수 없었다. 저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결국 도시로 가는 걸 포기하고 어느 암초 위에서 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사람을 만났을 때도 눈보라가 쳤다. 인신매매단의 사주를 받은 어부가 항구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제이슨을 그물로 낚아챘고, 그대로 인어 박제가 될 뻔했다. 발버둥칠수록 밧줄이 피부를 갉아내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배트맨이야!” 하고 외쳤고, 거래 현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새까만 무언가가 사람들을 하나둘씩 기절시켰다. 가끔 노란 망토를 두른 아이가 배트맨 옆에 서서 뭐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제이슨은 물이 없어 말라 죽어가던 참이었다. 노란 망토가 인어를 발견하고, 급하게 바닷물을 퍼와 제이슨의 몸 위에 뿌렸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한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제이슨은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꽉 잡았다.

 “헉, 헉…. 살려줘, 난, 아직… 헉, 죽고 싶지 않아….”
 “...조금만 참아라.”

  그렇게 제이슨은 눈보라가 치는 날에 배트맨과 로빈을 만났다. 까만 카울 아래의 진짜 신분인 브루스 웨인, 딕 그레이슨과 만나 짧게나마 함께 생활했던 때가 정말 제이슨 인생 최고의 날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다 지나간 이야기다. 최고의 순간을 스스로 버렸으니.

 “배트맨?”
 “그래. 고담이 어딘지 알아? 하여튼 엄청난 대도시인데-”
 “어딘지 안다.”
 “음, 그래. 하여튼 난 배트맨한테 구조받고, 다시 바다에서 살다가…”
 “우리 조부님께 붙잡혀 왔군.”
 “그래. 그러니까, 눈이 보고 싶어.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 여기선 절대 볼 수 없잖아? 그러니 꿈에서라도 볼 수 있게 날 내버려 둬, 왕자님. 너도 좋은 꿈 꾸고. 아! 책은 거기 옆에 뒀어. 덕분에 잘 읽었어. 고맙다. 진짜 안녕.”
 
  인어는 수조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데미안은 제 발치에 떨어져 있는 책을 주워들고 방에서 나왔다. 여기서 배트맨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제이슨이 고담 태생인지조차 몰랐다. 배트맨은 탈리아와 라스가 간혹 언급하던 사람이었다. 고담의 수호자 배트맨과 로빈. 그리고 그들의 협력자 웨인 엔터프라이즈와 최고경영자 팀 웨인. 라스가 어째서 어린 COO를 불러들이려는지 대충 이해가 되었다. 그를 미끼로 배트맨을 불러들이려는 속셈이다. 리그원이 섣불리 적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것보다, 적을 이쪽으로 끌어오는 게 여러모로 유리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던, 무조건 데미안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눈이 보고 싶다며 추억을 회상하던 인어를 떠올렸다. 제이슨의 추억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배트맨이 조금 질투가 났다. 그에게 눈을 만들어 줄 수 없을까? 하지만 이건 에스 알테반을 떠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제이슨을 밖으로 이동시키려면 이동식 수조가 필요하다. 그걸 구하는 방법도 어렵거니와 만약 수조를 구한다 해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제이슨이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병원으로 데려간다면… 병원이 아니라 연구소로 가겠지. 제이슨은 영원히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그건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거기까지 생각하자마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라스에게 반기를 들던 사람을 비웃던 데미안이었다. 그들의 최후를 기억해보라. 지금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거에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사랑은 만족이란 걸 알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데미안은 못해도 사흘에 한 번씩 2층으로 가 제이슨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데미안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도 경계심을 버리지 않던 제이슨은 이제 완전히 관계를 받아들였는지 좀 더 살갑게 굴며 오히려 데미안을 귀여워했다.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데미안이 어리기 때문에 제이슨이 좋게 봐주는 건지, 아니면 데미안 자체가 마음에 들었는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인어의 보석 같은 눈에 자신이 비쳐 보이는 걸 보면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이슨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할 말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만큼 제이슨을 믿고, 그를 의지한다는 의미였다. 제이슨은 어느새 데미안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인어는 바닷물과 민물을 가리지 않아?”
 “응, 그렇지. 그래도 바다가 더 편하긴 해. 활동 공간이 넓고, 먹이도 많거든. 여기도 바닷물로 맞춰져 있어.”
 “그럼 그, 아쿠아맨처럼 물고기한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쿠아맨이라 가능한 거고. 근데 물고기 떼를 한 번에 잡아먹는 묘기는 보여줄 수 있어.”
 “…….”
 “하여튼 놀리는 반응이 있단 말야, 왕자님.”

  처음에 후계자라며 잔뜩 오만방자한 태도로 굴던 녀석은 어디 가고, 호기심 가득한 꼬마만이 남았다. 제이슨으로서는 남동생이 생긴 느낌이라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다만 데미안에게 여전히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가끔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강렬하게 뿜어져 나와 헛구역질을 참기가 힘들었다. 네 정체가 뭐냐고 물어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선을 넘지 않고 이 공간 너머의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데미안의 대답을 들어보면 여긴 왕정 국가에 가까운 곳이었다. 왕이 있으면 왕위쟁탈전이 있고, 왕위쟁탈전이 있으면 피 터지는 권력 싸움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데미안도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나았다.
  작은 수조에 갇힌 제이슨이 할 말은 아니지만, 데미안이 가여웠다. 그래봤자 제이슨보다 한참이나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이따금씩 그의 몸에 난 상처나 행동거지를 보면 학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데미안도, 브루스처럼 자경단 활동 비스무리한 걸 하는 게 아닐까? 정도의 추측까지만 할 뿐이다.

 “보름 뒤에 여기서 성대한 연회가 개최될 예정이야.”
 “그래? 어쩐지 신입이 들어오더니 그런 이유였군. 난 열심히 물고기들이랑 춤춰야겠네.”

  어제 장정 두 명이 와서 수조에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을 집어넣고 갔다. 조용하던 수조에 뽈뽈거리는 작은 물고기들이 들어와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 보는 물고기도 있었고, 바닷속에서 맨날 보던 종도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오랜만에 접해서 어제 종일 수조에 머무르며 물고기들을 관찰했었다. 물고기들이 수조를 헤엄치는 걸 보니 수조가 아니라 어느 조그마한 바닷가에 온 느낌이 들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왕자님은 바쁘겠네. 여기저기 귀빈들 보러 가야 할 거 아냐.”
 “난 아직 어려서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아.”
 “축제 신나게 즐기고 후기 들려줘. 난 항상 여기 있을 테니까. 아, 사진 찍어오면 되겠네.”
 “사진?”
 “그래.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사진 찍으면 되잖아.”
 “난 개인 소지품이 없어.”
 “왕자인데도?”
 “그건 내게 불필요한 물품들이야.”

  라스와 탈리아는 데미안에게 생존 필수품과 칼 하나만을 주었다. 훈련에 필요한 준비물은 전부 도시에 있었다. 필요 이상의 개인 재산은 쓸데없는 과욕만 부를 뿐이었다.


  제이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이슨이 본 인간들은 전부 다 네모난 핸드폰을 들고 다녔다. 인어들끼리는 초음파로 어느 정도 먼 거리 의사소통이 가능했기에 통신용으로는 필요 없지만, 기능이 많아서 다른 목적으로 갖고 싶기도 했다. 허나 인어 기준으로 핸드폰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닷속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핸드폰을 선물 받고 신나서 바다에 뛰어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고장 났던 적이 있었다. 켜지지 않는 까만 화면을 보고 얼마나 침울해했던지. 이후로 핸드폰을 갖고 다니지 않았지만 그래도 탐이 나서 멀리서 볼 때마다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제이슨의 과장된 반응에 데미안이 무안한 듯 시선을 돌렸다.

 “오해하지 마. 핸드폰을 못 다룬다는 소리가 아니야.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난 헬리콥터를 비롯한 10개 이상의 조종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어.”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연락을 어떻게 해?”
 “그건….”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어디선가 까만 복면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제이슨은 낯선 사람의 등장에 황급히 수조로 몸을 감췄다. 데미안은 제이슨과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받아 불편한 기색으로 암살자의 전언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전령은 탈리아의 심복이라 데미안이 2층에서 인어와 만나고 있어도 라스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탈리아님의 호출입니다. 방에서 기다리십니다.”
 “알겠어.”
  암살자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데미안이 제이슨을 부르자 제이슨이 눈만 빼꼼 내밀고 주변을 확인했다.

 “…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한다고?”
 “그렇지.”
 “여기가 특이한 곳이란 건 알았지만…. 그래, 얼른 가 봐. 나도 아래에서 재롱 좀 부려야겠어.”

  제이슨은 별다른 인사 없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내가 널 부르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해? 그걸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 꼬마 왕자랑 뭘 얼마나 더 하겠다고…. 자조적인 웃음이 절로 나왔다. 물속에 숨어서 이제 뭘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수면 위로 데미안이 떠나지 않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빨간 꼬리가 물에서 빼꼼 튀어나와 좌우로 흔들렸다. 인어는 물속에서 말하기가 여의치 않으니 만날 때 반가움의 표시로, 헤어질 때 잘 가라는 의미로 꼬리를 흔든다고 한다. 데미안은 미소를 짓고 생각을 정리한 후. 방에서 나왔다.

 


  최근 훈련은 전부 만족스러웠다. 이름난 검술 스승의 목을 베어 강함을 증명했고, 클론에게 반격할 틈조차 주지 않고 전부 깔끔하게 승부를 냈다. 요 며칠 데미안의 컨디션은 최고조로,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더 높은 경지를 위해 새로운 시련이 필요하긴 했다. 아마 탈리아가 부른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인어와의 밀회를 들켜서 경고하려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탈리아는 이제 이곳을 벗어나 난다 파르밧으로 가서 수행하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난다 파르밧, 히말라야에 위치한 곳으로 유명한 무술인들이 수행을 하며 내공을 쌓는 신성한 장소이다. 데미안은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낯선 곳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인어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어를 산으로 데려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데미안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탈리아가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연회가 끝날 때까지 말해달라고 했다.
  난다 파르밧으로 가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거기엔 정말 전설적인 무술인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언젠가 가게 될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회가 불쑥 다가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연회가 끝난 후 자신이 무슨 결정을 내릴지 이미 정해져 있긴 했지만,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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