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오아시스 [2]
연성2022. 6. 13. 00:01<인어슨른 온라인 온리전 Dive Into The Ocean>
뎀슨 / 인어 AU / 슨른 기반

축제가 시작되기까지 열흘이 남았다. 도시는 벌써 축제 준비에 한창이다. 인어를 내세운 홍보가 무척 잘되어 인근 도시까지 합세해 축제를 진행한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일주일 동안 개최될 예정이었던 축제가 3주 정도로 변경되었다. 물론 귀빈들과 함께하는 연회 일정은 기존과 동일하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어떻게든 해내는 게 알굴이었으니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데미안은 에스 알테반에서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입구 근처에서 장정들이 조각상을 옮기는 게 보인다. 축제는 매년 열릴 때마다 주제가 바뀌는데, 이번에는 사막에서 펼쳐지는 물과 별의 축제…라는 가제가 붙어 있다. 그래서인지 인어 조각상이 입구 앞에 세워져 있다.
메인 행사는 인어가 펼쳐 보이는 환상적인 수중 곡예 무대와 천체 관측이라고 한다. 어쩐지 제이슨을 만나러 갈 때마다 그가 잠들기 전까지 연습하느라 피곤하다고 앓는 소리를 냈었다.
“열심히 하는군.”
“아! 왕자님. 나 연습하는 거 봤어? 다들 날 보러 올텐데, 인어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긴 해야할 거 같아서.”
“충분히 아름다운 인어인걸.”
“…꼬마 왕자 주제에 번지르르한 말은 잘하네.”
연습은 피곤하고 가끔은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나 생각이 자주 떠오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곡예를 하는 동안에는 지내던 수조가 아니라 다른 수조로 옮겨진다고 하인이 알려줬고, 거기선 바깥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고 전달받았다며 이야기하는 내내 잔뜩 신이 나 보여서 응원해주고 오는 길이었다.
관측 쇼는 슈퍼 블러드 블루 문이 이곳, 에스 알테반에서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학자들이 예측한 게 있었다. 축제가 다른 도시에서도 열리지만, 월식 현상은 이곳에서 보는 게 최고라고. 한 달에 두 번 뜨는 월식 현상, 빨갛게 차오른 달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제이슨이 생각났다.
데미안은 밝은 빛이 아른거리는 도시 경관을 바라보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새까만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이 반짝거렸다. 제이슨도 이런 하늘을 보고 자랐을까? 요즘 공상을 할 때마다 자꾸 제이슨과 연관 짓는 버릇이 생겼다.
어제, 기나긴 고민 끝에 탈리아에게 인어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탈리아는 데미안의 고백을 듣고 이미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대놓고 궁전 2층을 드나들었는데, 모를 리가 없다며.
“내가 너에게 2층 출입 권한을 줬을 때부터 알았지.”
“…왜 인어와 만나는 걸 막지 않으셨죠? 제 의지력을 시험하신 건가요?”
“애초에 말릴 생각이 없었어.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 그건 맞서기 힘들단다.”
탈리아는 데미안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짧지만 강렬했던 관계. 슬슬 이 인연을 바꿀 때가 되었다.
“네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모르게 궁전 병사 배치만 바꿔뒀어.”
“그럼….”
“하지만, 그게 앞으로의 행보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돼. 마찬가지로 인어가 1순위가 될 일이 없어야 할거다.”
난다 파르밧 여행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다. 탈리아는 데미안이 여길 떠나길 바랐다. 그걸 데미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계속 외면하고 있었을 뿐. 정말 이제는 마음가짐을 정리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축제 구경은 이쯤하고 훈련실로 돌아갔다. 축제를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들떠서 일을 망쳐버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아이처럼 굴지 말고 정신 차려야 했다. 한 번의 방심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드니까. 그리고 그 결과란 죽음과 같았다. 데미안에게 있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오후 내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훈련에 열중했다. 데미안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저택이 굉장히 조용했다. 주요 인원이 지상에서 축제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런 듯 했다. 자기 전 책이나 읽을까 싶어 서재로 가기 위해 라스의 집무실을 지나가는데, 살짝 열린 문 틈새에서 흘러나온 말이 데미안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인어의 상태는 어떻지?”
“-아주 좋습니다. 작업 도구도 완성되었습니다.”
“-좋군. 연회에 바로 쓰일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도록 해라. 연구소 측 배양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인어를 완전히 재현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나,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래. 계획대로 인어 공연 순서가 끝나면 바로 손질 시작하도록 해. 손님들에게 최상의 인어 고기를 대접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인어 고기? 배양? 대접을 해? 데미안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궜다. 주위에 숨은 암살자가 없다는 걸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머릿속이 엉망진창 뒤죽박죽 엉켰다.
짧은 대화였지만 전체 내용을 알아내기엔 충분했다. 대화를 해석하면 연회 때 제이슨-인어를 죽여 그 살점으로 요리를 한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알굴의 독보적인 클론 과학을 이용해 인어 DNA를 추출, 인조 인어를 만들어 제이슨의 자리를 대신해 인어가 살아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낼 작정이었다.
라스는 인어를 이용해 사람을 불러오는 게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라자러스 핏의 물이 체내에 흡수될 때까지 기다린 후 ‘신성한 라자러스 핏의 물을 머금은 인어 고기’ 따위의 이름을 붙여 연회 때 먹는 게 그가 원하는 바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어를 먹는다고 불로불사가 되는 것도 아닌데. 인어가 살 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리면 곧이곧대로 들어준 이유가 있었다. 제이슨은 절대로 죽어선 안됐다. 심지어 죽고 난 후에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왔다. 데미안은 벽을 짚고 울렁이는 속을 겨우 진정시켰다.
탈리아도 이걸 알고 데미안에게 인어를 마음에 두지 말라고 경고했나 보다.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오히려 데미안이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해이해진 정신에 충격을 주기 위해 어느 정도 방관하기로 한 게 틀림없다.
‘난 여기서 뭘 해야 하지? 모른 척 연회를 보내고 수행을 갈지, 아니면 제이슨을 데리고… 여길 떠나야 하는 건가?’
한 달 전의 데미안 알굴 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전자를 선택했다. 난다 파르밧으로 가서 쟁쟁한 무술인과 실력을 겨루고,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힘을 기른 후 라스의 자리를 이어받아 결국 세계를 정복해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물론 두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진 않지만, 제이슨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두 마리 토끼를 전부 다 잡을 수는 없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직 연회가 시작될 때까지 시간은 충분히 남았다.
축제가 시작하기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제이슨은 물속에서 유연하게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는, 허공에 팔을 휘저어 생긴 물거품을 하트 모양으로 그려냈다. 떼를 지어 다니는 물고기를 따라 크게 한 바퀴 돌아다니기도 하고, 물 위로 뛰어올랐다가 빠르게 다이빙하는 묘기를 보이기도 했다. 수조에서 마음껏 헤엄치는 제이슨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인어의 아름다운 자태에 미소가 절로 나왔지만, 잊을만 하면 자꾸 라스의 말이 떠올라 입꼬리가 굳었다. 제이슨의 몸에 칼을 대어… 그걸…. 오늘 먹은 음식이 역류할 거 같아 급하게 자리를 떴다. 당분간은 고기를 입에 대지 못할 듯 싶었다. 어쩌면 계속 그럴지도 모르겠고.
오늘은 인어에게 찾아가지 않고 서재로 이동했다. 찾고 싶은 책이 있었다. 에스 알테반의 축제 유래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정식 출간본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모은 사료를 묶은 인쇄물에 불과하여 수천 권의 서적 속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라스 알굴과 일족들이 모은 서적은 분량이 방대했고, 그중 분류되지 않은 인쇄물은 절반이 넘었다. 산처럼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서 한동안 고군분투한 끝에, 데미안은 고어로 적힌 얇은 책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책은 그냥 만지면 크게 흠집이 날 수 있어,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데미안은 책상 위 받침대에 책을 올려두고 가죽 위에 칼로 문자를 새긴 내용을 찬찬히 읽었다. 몇몇 글자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라스가 연설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일치했다. 축제는 항상 라자러스 핏에서 나온 물을 이용해 수확한 재료들로 음식을 대접하여 마무리한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저 축제 기원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이상한 문구가 있었다. 달이 에스 알테반을 전부 집어 삼키는 날,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인 존재를 제사에 올린다. 이건 아무리 봐도 달이 공전하다 근지점에 도착해 평소보다 크게 보일 때, 즉 슈퍼문 현상일 때 인어를 죽인다는 뜻으로 읽혔다. 책을 다시 자세히 읽고, 다른 문헌도 참고해봤지만 이런 야만적인 관습이 왜 생기고 지금까지 대대로 내려오게 된 건지 유래를 알아낼 수 없었다.
‘인어를 바치는 이유는, 고대에서부터 전해진 저 전설 때문에 그런 건가. 하지만 이상하다. 지금까지 축제 기간 때 슈퍼문이 보였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인어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인어가 희귀종이라 하더라도, 알굴의 정보력이면 언제든 손쉽게 포획할 수 있었을 텐데.’
에스 알테반과 관련된 사료를 전부 헤집어 찾아봤지만, 영 의문이 풀리지 않아 범위를 넓혀 좀 더 자료를 뒤졌다. 하지만 조사할수록 더더욱 인어 고기 섭취 행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인어를 먹으면 불로불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보이긴 했지만 전부 추측에 불과했다. 그럴듯한 근거가 없었다. 누군가 실제로 인어를 잡아 그의 다리살을 뜯어먹었는데, 이후 식중독으로 급사했다는 기록은 있었다. 그 외에는 인어 존재 자체가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며 박제로 만들어 보관했다는 이야기, 인어와 사랑에 빠져 다리를 지느러미로 만드려다 실패한 내용뿐이었다.
지식을 통해 의문을 해소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의문이 심화 되는 결과만 낳았다. 하필 이번 축제 때, 라스가 인어를 먹으려는 이유가 뭘까? 그나마 가장 합당한 이유로는 불로불사가 그럴 듯 했다. 거기다 특이한 자연 현상까지 겹쳐 더 그랬다. 생각해보면 데미안이 많이 어리긴 하나 스스로의 몸은 지킬 수 있는 능력은 갖추었고, 라스의 나이도 그리 적은 편은 아니므로 데미안에게 일부 권한을 줘서 국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경험을 쌓게 해줄 법도 한데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계자로서 기대한다는 말은 올해만 따져도 이미 여러 번 한 소리다. 이쯤 되니 정식으로 후계자를 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나 의혹이 든다. 라스에게, LOA에서 데미안 알 굴의 존재는 뭐지?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추상적인 개념을 곰곰이 짚어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서재에서 나온 데미안은 곧장 궁전 2층으로 올라갔다. 인어를 만나려고 한 게 아니라, 팀 웨인을 제거하기 위한 밑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작업실에 비치된 태블릿의 전원을 켰다. 웨인 엔터의 CEO 브루스 웨인은 그 명성 때문에 여러 곳에서 납치와 살해 협박을 받았지만, 그의 양아들인 팀 웨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어렸기 때문에 범죄 조직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니 납치 관련 기사가 상단에 떴다. 이런 처지인데도 고담에서 멀리 떨어진 에스 알테반에 초대받아 홀로 온다니, 대범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원래는 브루스 웨인이 에스 알테반에 와서 라스와 다른 정재계 인사들과 만찬을 가지기로 했는데, 내부 일정으로 인해 팀 웨인이 방문하기로 변경되었다. 웨인의 일정 변경인지, 아니면 알굴에서 티모시를 보내라고 압력을 넣은 건지는 모르겠다. 공식 일정이 끝나면 라스와의 단독 대면이 남아있다. 회의 결과에 따라 고담행에 진짜 팀 웨인이 탈지, 아니면 그의 꼭두각시가 탈지 달라질 것이었다.
준비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태블릿을 끄려다가 검색 엔진에 ‘고담’을 쳤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배트맨이었다. 배트맨과 그의 동료들. 인구 800만 명의 항구도시.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진 최첨단 도시. 최고의 범죄율을 자랑하는 도시. 박쥐의 도시. 관련 이미지를 쭉 훑어보다가 바다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구도의 사진을 발견했다. 제이슨이 처음 고담과 마주했을 때 이런 장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의 선택지는 차츰 어딘가로 기울고 있었다.
“고담, 언젠가 네가 지배할 곳이지.”
“어머니.”
데미안은 화들짝 놀랐지만 애써 침착한 어투로 대답했다. 탈리아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탈리아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곳에 다른 사람은 없다. 듣는 귀가 많아지기 전에 서둘러 아들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암살 준비는 전부 끝난 듯 하구나.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네가 갈 곳이 있다. 올카스트의 현자 듀크라가 네게 건네줄 물건이 있다고 해.”
“올카스트?”
“그래. 최고의 전사 집단 중 하나지. 내가 일러준 장소로 가면 체임버 오브 올로 통하는 포탈을 이용할 수 있어. 거리가 꽤 머니 당장 출발하거라.”
그는 데미안에게 통신기를 건넸다. 포탈이 있는 장소가 담긴 지도와 위급한 상황에서 탈리아와 바로 연락할 수 있는 긴급연락망이 들어있다. 다른 짐은 없다. 이대로 데미안을 외부로 내보려는 속셈은 아닌 듯 했다. 데미안은 통신기를 품에 넣었다.
“조부님께 보고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물건만 받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하렴.”
“네. 다녀오겠습니다.”
라스에게도 비밀이라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탈리아의 말에 잠깐 이유를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아냈다. 올카스트, 비밀리에 은신처에서 수련하는 승려 집단에 대해서 들은 적은 많으나 그곳에 찾아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데미안은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도시에서 빠져나갔다. 지도에 적힌 첫 번째 출입구로 가니 탈리아가 미리 준비해놓은 택시가 데미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건물 사이사이를 통과하고, 택시 안에서 찾은 기차표를 들고 기차에 올라타 기나긴 지평선을 따라 몇 시간 더 달린 후, 몇 걸음 더 걸어… 리그의 암살자만 알 수 있는 문양을 따라 포탈에 무사히 도착했다.
벌써 하루가 지났다.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그새 제이슨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불안했다. 탈리아가 인어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불경한 생각마저 들었다. 데미안은 초초한 마음으로 재빨리 포탈 안에 뛰어들었다.

데미안이 도착한 곳은 방금까지 있었던 공간과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장소였다. 압도적인 크기의 폭포와 경이로운 자연환경에 감탄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 세워진, 신화에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제단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이런 풍경은 본 적이 없었다. 올카스트는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그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 존재하는 특이공간에 있는 장소라더니, 데미안은 체임버 오브 올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네가 그 탈리아의 강아지로구나.”
“안녕하십니까, 듀크라.”
눈 깜짝할 새에 칼날 끝이 데미안의 목을 에워싸고 있었다. 리그의 암살자보다 훈련 수준이 높다고 들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보아하니 데미안이 살짝이라도 적대감을 드러내면 이들은 데미안이 인지하는 것보다 빨리 그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데미안은 양팔을 벌려 그들에게 적대적 의사가 없다는 걸 표현했다. 가지고 온 건 탈리아가 준 통신기 하나뿐이었다. 무기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여기에 왜 온 건지 알고 있을 텐데, 환영 인사가 격하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듀크라가 침입자에 대한 판단을 내릴 동안, 데미안은 인내심 있게 살기와 침묵의 시간을 견뎠다.
“이리 따라와라.”
듀크라가 등을 돌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데미안의 급소를 노리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주위에서 사라졌다. 얼마나 강도 높은 수련을 견디면 이럴 수 있는 걸까. 처음 느껴보는 힘의 차이에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으나 때론 함구할 줄 알아야 했다. 데미안은 그를 따라 안쪽 깊숙한 곳으로 걸어 나갔다.
공간의 한계를 느낄 수 없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분명 폭포 안쪽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숲 속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한 두번 더 겪은 후 두 사람은 어느 제단 앞에 도착했다. 제단 위에는 단검이 올라가 있었다. 데미안은 단번에 단검을 알아보았다. ‘페스카즈’. 예리한 한쪽 날로 이루어진 S자 모양의 검. 키용부터 손잡이까지 녹빛의 섬세한 무늬의 그림이 새겨져 있고, 금으로 정교하게 도금되어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우아했다. 알굴식 디자인으로 구성된 검, 저번에 탈리아가 비슷한 검을 지니고 다니는 걸 보았다.
“듀크라, 이건…?”
“탈리아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한번 들어 보아라.”
어머니가 내게? 데미안은 단검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칼날 표면에 다마스크로 불리는 미세한 물결무늬가 보였다. 이 무늬와 칼은 단순한 호신용 단검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리그 오브 어쌔신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았다는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데미안은 라스에게 의뢰를 받아 목표물을 암살하면서 지정 무기를 지급받았다. 개인 무기 지참은 불가능했다. 사용된 무기는 무조건 버렸다. 신뢰받지 못한 자는 개인 무기를 절대 가질 수 없었다. 클론들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일한 성능을 가진 무기로 싸웠고, 목숨을 앗아가서 강함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무기를 준다는 건, 적어도 탈리아는 데미안을 인정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라스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알아서도 안된다는 거였구나. 굳이 이곳에서 검을 챙기라 한 건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네게 줄 게 또 있어.”
“이것도 어머니가 보낸 선물인가요?”
“아니. 내가 주는 호의라고 생각해라. 앞으로 필요할 거다.”
듀크라는 품에서 목걸이를 꺼내 데미안의 손에 올려두었다. 목걸이에 매달린 장식은 제이슨이 착용한 목걸이의 장식과 매우 유사했다. 인어 꼬리를 형상화한 장식 가운데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에메랄드가 박혀 있어, 눈길을 더욱 사로잡았다. 제이슨에게 선물로 주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탈리아의 호출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다. 굉장히 많은 세월을 살고 있는 듀크라라면축제와 인어의 관련성에 대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저, 듀크라.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물어보아라.”
“혹시… 인어의 살점을 먹으면 불로불사가 될 수 있습니까?”
듀크라는 데미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까부터 계속 느낀 거지만, 듀크라의 시선은 영혼을 꿰뚫는 느낌이 들었다. 치부까지 낱낱이 드러나는 기분이라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데미안이 갖고 있는 갈등, 반항심을 알아낸 게 아닐까. 데미안은 목걸이를 손에 꽉 쥔 채 듀크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다. 영생은 우리 또한 찾고 있는 진리이기도 하지. 인어는 한낱 생명체에 불과하다. 불로불사같은 능력을 갖고 있을 리가 없어. 다만….”
나흘이 지나면 축제가 시작된다. 데미안은 탈리아가 준 단검을 숨기고 에스 알테반으로 돌아왔다. 단겁은 데미안의 신체 일부분인 것 마냥 손에 아주 잘 맞았다. 과연 탈리아가 직접 의뢰한 물건다웠다. 라스와 우부 등 다른 사람들에게 검을 들키지 않도록 평소보다 신경 써서 옷차림을 정돈하고 궁전 2층으로 달려갔다. 데미안이 문을 열자 때마침 수조 위 은신처에서 데미안이 가져다 준 책을 읽으며 쉬고 있던 제이슨이 팔을 흔들며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토드, 네게 줄 선물이 있어.”
“응? 왕자님, 한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여행 갔다 왔구나.”
데미안은 팔을 뻗어 제이슨에게 펜던트를 건넸다. 제이슨은 데미안에게 펜던트를 받고 놀란 표정을 짓고서 한동안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인어와 관련된 보편적인 고유 형태 같은 게 있는 걸까? 제이슨은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 장식과 펜던트를 번갈아 관찰하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두 장식품은 거의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꼬리 부분을 조각한 악세사리.
‘어차피 진짜 유품도 아닌데, 바꿔 낄 때도 되었지. 근데 목걸이 장식 바뀌었다고 라스가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뭐, 상관없으려나.’
막상 목걸이를 벗으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나름 소중한 추억이 담긴 목걸이였다.
웨인에게 거둬져 그들에게 이런저런 훈련을 받으며 살던 때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당시는 특히 인어가 살아있는 재산 취급을 받았다. 보호자 없이 밖에 나가면 암상인들에게 붙잡혀 팔려나갈 수 있었기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주변에 또래라고 부를 사람이 브루스 웨인의 양자이자 배트맨의 파트너 딕 그레이슨뿐이어서, 하루 대부분을 그와 함께 보냈었다. 보통은 바다에서 딕과 수영하거나, 프라이빗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케이브의 출입구 중 하나가 웨인의 개인 소유로 등록된 바다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목걸이를 발견한 건 해가 지평선 너머로 스멀스멀 가라앉기 시작하던 때였다. 딕이 바닥에서 뭘 주웠다며, 파도에 휩쓸려 잃어버리지 않도록 무언가를 꽉 붙잡은 채로 제이슨에게 다가왔다. 이게 뭔데? 제이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딕이 손바닥을 펼치기를 기다렸다. 딕이 발견한 건 인어 꼬리를 모티브로 조각된 산호 조각이었다.
“뭔가…어디서 본 거 같은 모양이네.”
“인어의 상징 같은 걸까? 이거 자세히 보면 구석에 J라고 적혀있거든. 너랑 관련 있지 않을까?”
“온 세상에 J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인어가 얼마나 많은데.”
제이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딕이 주는 조각품을 소중히 건네받았다. 언뜻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자세히 보면 꼬리 끄트머리에 J라고 표시된 흔적이 있었다.
“이거 알프레드한테 가서 목걸이로 만들어달라고 하자!”
“목걸이로?”
“응. 너한테 무척 잘 어울릴 거야.”
저택에서 기다릴게! 딕은 조각을 다시 챙기곤, 저 멀리 보이는 저택으로 달려갔다. 이후 제이슨이 저택에 올라갔을 때, 알프레드는 특수소재로 만들어진 줄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제이슨은 이걸 유품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목걸이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품이라고 말하면 다들 표정이 꽤 우스꽝스럽게 바뀌어서 그냥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이후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답시고 저택에서 나와 많은 일을 겪고, 어느 밀매업자한테 납치당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 배트맨에게 의지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슬슬 이런 기억은 놔줘야겠지.
인어는 목걸이를 벗고 은신처 구석에 숨겨놓은 후, 데미안이 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런데 목걸이 잠금 장식이 혼자 하기에는 잘 되지 않았다. 잠금 장치가 뭐 이래? 일반적인 잠금 장식이 아니었다. 혼자 해보려고 잠시 끙끙거리다가, 결국 데미안에게 목걸이를 해달라고 이야기했다. 데미안은 눈앞을 가득 채운 촉촉한 하얀 살결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고리에 잠금장치를 채우면 되는 일반적인 목걸이 잠금이 아니라 조금 독특한 장치라 데미안도 끙끙거리며 목걸이를 채웠다.
보석이 달려있어 조금 무게감이 느껴질 거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길이도 적당하고, 보석은 뭍에서 투박한 반사광을 보였지만 물속에 들어가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냥 악세사리 하나 바꿨을 뿐인데, 뭔가 지느러미 끝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야, 잘 어울려?” 데미안은 위아래로 제이슨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듀크라가 왜 목걸이를 줬는지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인어가 너무나 예뻤다.
“되게 예쁘다. 어디서 가져왔어?”
“선물로 받았어. 네가 좋아할 거 같았거든.”
“흠, 어린애 취향치곤 나쁘지 않아.”
제이슨이 별 불평 불만 없이 목걸이 선물을 받아들여서 다행이었다. 데미안은 듀크라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아주 옛날부터 기원조차 모르고 행해진 의식이 하나 있다. 약 1세기마다, 때가 되면 인어를 제물로 바치고 그것의 피와 살을 먹는 행위가 이어져 내려왔다. 어째서 그런 의례가 사라지지 않고 현대까지 남아있는지는 모른다. 추측하자면 라자러스 핏이 마르지 않는 이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정도이며 확실한 건 라스 알굴이 오래전부터 예식을 도맡아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목걸이는 모종의 방법으로 올카스트를 방문한 인어가 남긴 물건이며, 데미안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했다.
목걸이가 제이슨을 어떻게 구한다는 거야? 역시 올카스트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건가.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이슨과 함께 도망친다, 쪽으로 마음이 굳어가곤 있는데 완전히 결정 내리지 못한 건 역시 탈출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의 한숨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축제 시작까지 사흘 전. 팀은 분주하게 방을 돌아다녔다. 여행지에 챙겨갈 물품은 아직 한가득 쌓여 있는데, 캐리어는 벌써 가득 차서 더 들어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팀, 정말 괜찮아? 그냥 내가 갈까?”
“아냐. 고담엔 배트맨이 필요하잖아.”
“그건 루시우스 씨나 고든 경감님께 맡겨도 될 문제야.”
“정말 난 괜찮아, 딕. 가서 별일 있겠어?”
“팀….”
딕은 팀의 의지에 찬 표정을 보고 더 말릴 수 없었다. 그저 무슨 일 있으면 당장 연락하라고 걱정 어린 잔소리만 몇 마디 더 늘여놓고, 팀의 여행 준비를 도왔다. 하필 이런 때에 라스 알굴이 개최하는 수상쩍은 축제 초대장이 왔다. 가지 말라고 설득해봤지만, 그곳에 있는 인어를 보고 난 후 팀은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막무가내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 절대, 혼자서 나서지 마. 넌 그냥 그 인어가 제이슨이 맞는지 확인하러 가는 거니까.”
“알겠어.”
딕은 귀를 톡톡 두드렸다. 팀은 수신기가 잘 작동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트맨이 저스티스 리그 임무 때문에 우주로 나가서 고담을 비운 지금, 딕이 맏형으로서 가족과 고담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팀과 함께 에스 알테반으로 가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원거리에서 지원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딕이 방을 나간 후, 팀은 기존 수신기를 미리 개조를 해둔 신형 수신기로 재빠르게 바꿨다. 기존 GPS와 통화 기능에 스텔스 기능을 추가했다. 팀의 좌표가 실시간으로 케이브에 전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보이도록 꾸며낸 가짜였다. 온오프가 가능하기에 특정 상황에서만 쓸 수 있었다. 딕에겐 미안하지만, 팀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럼 한번 떠나볼까.”
팀은 캐리어의 지퍼를 마저 잠그고, 방에서 빠져나갔다.
축제 전날, 데미안은 평소처럼 인어에게 말을 걸기 위해 궁전 2층으로 향했다. 드디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제이슨과 함께 이곳을 탈출한다. 제이슨이 잡아 먹히기 전, 손질을 위해 이동할 때 그를 습격하여 제이슨을 다른 수조로 옮기고 미리 구해둔 헬기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제이슨에게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본인이 싫다고 해도 당연히 데려갈 거지만, 그래도 예의상 한 번 정도 물어볼 순 있으니까.
그러려고 찾아갔는데, 데미안을 반긴 건 텅 빈 수조였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여기서 인어와 시덥잖은 잡담을 나눴는데,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최악의 시나리오 몇 개가 데미안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데미안은 크게 당황하며 근처 돌아다니는 하인을 붙잡고 인어의 행방을 물었다.
알고 보니 제이슨은 이미 다른 수조로 옮겨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축제 기간 효율적인 동선 확보를 위해 위치를 바꾼 듯 싶었다. 수조의 위치를 알고 싶어서 하인을 붙잡고 인어가 어디로 갔냐고 물어봤지만 다들 하나같이 입을 맞춘 듯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다. 첫 단추부터 엇갈리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이 망한 건 아니다. 데미안은 밤새도록 축제 참가 인원의 동선을 확인하고, 주요 건물 위치를 파악하며 계획을 세웠다. 그러는 사이 새벽을 지나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축제 첫날을 맞이했다.

공식적으로 에스 알테반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전 세계에서 인어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데미안은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가식적인 태도로 이들을 안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데미안은 허름한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낡은 옷으로 갈아입어 현지인 행세를 하며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이렇게 관광객이 많아서야, 어디 찾아가기도 어려울 듯 싶었다.
그나저나 인어를 어디다 뒀는지, 어느 수조에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고 제이슨에게 준 목걸이에 위치추적기를 붙였다. 덕분에 제이슨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위치는 확인 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 무작정 쳐들어갈 수 없었다. 제이슨은 라스의 집무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처음에 위치를 보고 설마 목걸이를 따로 벗겨놨나 싶었다.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아침에 문안인사를 드릴 겸 집무실에 찾아가서 확인해본 결과, 다행히 목걸이를 분리해놓은 건 아니었다. 어째서 그를 그곳에 가져다 놨는지 대충 예상은 되었지만 정말 그 이유가 아니길 바랐다. 차라리 인어를 라스 알굴만의 장식품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는 게 더 나아보이기까지 한다. 어쨌거나 그런 탓에 무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개인적으로 그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인어는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하루에 한 번, 야외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 공연하는 동안에는 그를 데리고 갈 순 없겠지. 제이슨을 데리고 나갈 출입구와 거리가 멀고, 당연히 무대 주변에 암살자들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진 데미안이라 할지라도, 혼자는 모를까 제이슨과 함께 이곳을 무사히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어에게 다리라도 생기면 그건 또 다른 가능성이 있지만.
축제를 즐기라는 약간의 배려인지, 아니면 그만큼 바빠서 데미안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는지,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에 따로 준비된 훈련이 없었다. 저택을 돌아다니는 클론 무리는 여전했으나 그들은 지상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데미안은 자유롭게 탈출로를 구상하며 축제를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인어의 단독공연이었다. 탈출 계획에 약간 문제가 생겼는데 지금 당장 방법을 모색하고 싶어도 괜찮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일단 조금 쉴 겸, 제이슨을 볼 겸 야외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금세 무대 주변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건 질색이었으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는 이보다 제격인 게 없었고, 정말로 관광객들은 데미안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데미안은 다양한 언어 속 대화를 엿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언제 시작하려나, 바람결에 찰랑이는 수면 위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는 탈출 시뮬레이션을 굴리고 있는데, 갑작스레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 여기 옆자리에 앉아도 되지?”
“........”
“앗, 영어로 말하면 모르나?”
척 보기에도 고급진 옷을 입은 까만 머리 소년은 어색한 이국 억양으로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데미안은 소년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흑발 벽안의 소년, 데미안의 암살 대상인 팀 웨인, 만찬 참여자이니 당연히 어디선가 마주칠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바로 만날 줄은 몰랐다. 데미안은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 그러나 바디랭귀지로 대충 이해했다는 몸짓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이 앉은 자리는 무대 정중앙으로, 흔히 말하는 명당자리였다. 고작 팀 웨인 때문에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팀은 자리에 앉은 후 넉살 좋게 데미안에게 말을 걸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무슨 의심을 살까 봐. 아까처럼 영어를 잘 모르는 척 팀의 말에 어설프게 맞장구를 쳤다.
‘이 녀석은 경호원도 안 데리고 다니는 건가?’
데미안은 팀의 이야기는 대충 흘러 듣고, 어깨 너머를 흘깃 보며 주변 경호 인원을 살폈다. 하지만 사방이 관광객으로 둘러 쌓여 있어 경호원들의 존재를 찾는 것도, 경호원들이 팀 웨인을 경호하러 오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양옆에 경호원을 끼고 돌아다니는 도련님이라 생각했는데. 혼잡하니까 일부러 경호원을 떼어놨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넌 여기서 사는 거지? 그럼 인어를 실제로 봤겠네?”
“......”
“나 진짜 인어 좋아하거든. 옛날에 보고 한눈에 반했어.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드디어 여기서 그를 볼 수 있게 되다니.”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신나서 인어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팀은 굉장히 신나보였다. 이제 정말 대꾸하는 것조차 귀찮아진 데미안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혼자서 인어에 대해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풀었다. 이야기는 데미안에게 전혀 영양가가 없는 자기 자랑거리였다. 데미안은 팀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제이슨을 기다렸다.
마침내 공연 시간이 다 되었고, 누군가의 호령과 함께 인어가 수조에서 한 바퀴 뛰어오르며 그 존재감을 빛냈다. 수조 안에 갇혀 헤엄칠 때와는 또 다른 힘찬 움직임이었다. 거기다 제이슨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그의 지느러미와 목에 걸린 보석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인공 조명 아래보다 햇빛 아래서 헤엄치는 장면이 훨씬 아름다웠다. 데미안은 주먹을 꽉 쥐고 제이슨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팀은 카메라를 이용해 제이슨을 찍고 있었다. 이따금씩 “우와”, “정말 아름다워” 등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쉴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보니 저번에 제이슨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이거 봐, 잘 찍었지?”
“....”
“내가 사진에 관심이 좀 많거든. 내 말동무가 되어준 보답으로 나중에 고담에 놀러 오면 앨범 하나 줄게.”
안 보려고 했지만 팀이 카메라를 눈앞에 들이대길래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데미안은 화면 속에 멈춰 있는 인어의 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사진을 잘 찍긴 했다. 그래도 칭찬은 하지 않았다. 친도 딱히 큰 반응을 원한건 아닌 듯 다시 사진 찍기에 몰입했다.
원래 외국인 부자 2세는 다 이런가? 내가 누군지 알고 이렇게 서슴없이 구는 거지? 아, 모르니까 저렇게 쓰잘데기없는 말을 하는거군. 그냥 지나가듯 하는 말이겠지. 데미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공연에 집중했다. 드넓은 인공 수조에서 헤엄치는 제이슨을 볼 때마다 어떻게든 그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야겠다는 책임만 더더욱 커져 갔다.
무대 공연이 끝난 후, 데미안은 옆에서 재잘거리던 팀이 자리를 떴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언제 없어진 거지? 제아무리 인어 공연에 집중하고 있었다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의 움직임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뒤늦게 팀을 좇았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팀 웨인을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 이후 데미안이 가는 곳마다 이상하리만치 팀과 자주 마주쳤다. 광장에서 끼니를 해결할 때도, 탈출로 확보를 위해 무술 훈련을 끝내고 남은 시간 동안 주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도, 도시 주변을 순찰하러 다닐 때도. 팀이 데미안을 발견하기 전에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었으나, 팀 웨인과 자꾸 마주치는 게 영 거슬렸다.
그런데 팀과의 만남은 데미안에게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어 주었다. 에스 알테반에서 운 좋게 탈출하면 어디를 향해 갈 것인지 한참 동안 고민했었다. 탈출 후 거점을 만들기 전까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리그 오브 어쌔신에 대적할 수 있는 자경단원이 있으며 동시에 돈으로 은신처를 만들 수 있는 곳.
데미안이 생각해놓은 곳은 고담이었다. 제이슨의 고향. 아무래도 데미안과 제이슨 둘 다 낯선 곳보다는 한 명이라도 익숙한 곳이 좋았다. 그러면 이제 고담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인데, 그건 팀을 이용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팀을 협박해서 고담으로 돌아갈 때 함께 움직이려고 했는데,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협박이 아니라 회유로 그를 이용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인어를 데리고 간다고 하면 분명 말이 통할 것이다.
축제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갔다. 제이슨은 라스의 집무실, 야외 무대, 궁전 이렇게 세 곳에서만 지냈다. 각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은 매일 같았고, 인어가 들어 있는 수조를 경호하는 인원도 변하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데미안 실력으로 충분히 찍어누를 수 있었다. 그럼 이쪽 검토는 됐고. 데미안은 제이슨의 위치를 항상 확인하면서, 여전히 그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팀을 감시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호원이 팀에게 다가오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팀 웨인은 경호원 없이 이 낯선 땅에 홀로 찾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숨은 실력자일지도 모르겠군. 팀은 데미안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뜬 표정으로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그는 빈 벤치를 발견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척 귀에 꽂은 수신기를 작동시켰다.
“-계획에 변동사항은 없겠지?”
“그래. 그를 잘 부탁해.”
“-그가 누군지 알려줄 생각은 없어?”
건너편의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팀은 통신기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에스 알테반이란 낯선 땅에서 갑자기 나타난 인어를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모색하던 중, 현지인과 연락이 닿아 그를 빼낼 계획을 세웠다. 상대 측에서 조건을 걸었는데, 한 아이를 같이 고담으로 같이 데려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를 어떻게 찾지? 팀의 물음에 상대방은 인어를 찾으러 가면 알아서 찾아올거라고 일렀다. 확실히 지금 상황을 보니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밀어내도 억지로 쫓아올 것 같았다.
팀은 구석에서 저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데미안을 보고, 입술이 씰룩거리려는 걸 꾹 참아냈다. 일부러 말을 못알아듣는 척 딴청을 피우는데,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팀 눈에는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빤히 보였다. 팀도 팀 나름대로 머리가 꽃밭인 미국인 행세를 하긴 했다.
데미안과 미리 접촉한 이유는, 고담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 아이가 어떤 인물인지 미리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위험인물을 고담으로 데려갈 순 없으니 먼저 아이의 개인 정보를 찾아봤는데, 전 세계 신원을 모아놓은 데이터 베이스에 조회되지 않았다. 출생증명서도, 흔한 sns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깨끗하게 흔적이 남지 않으니 더더욱 의심쩍었다. 그러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 알아가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가 인어에 대해 저만큼 진심이라는 건 잘 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그를 지켜볼 예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라스 알굴과 팀 웨인의 비밀 면담 시간이 찾아왔다. 지상에서는 한창 축제와 연회가 진행중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슈퍼 블러드 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불그스름하고 평소보다 거대하게 보였다. 계획대로라면 데미안은 궁전 2층에서 대기하며 신호를 기다려야 하지만, 라스가 집무실에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이슨을 데려올 기회였다, 사고가 나더라도 연회장에 보는 눈이 많을 테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제이슨은 지금 연회장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저택 어느 방에 머물러 있다. 데미안은 탈리아가 준 단검과 장도를 챙기고 궁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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