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슨/ 소원의 거울 1

연성2025. 5. 24. 19:55

 

 

(광고)
그리운 사람이 있나요? 너무나 보고싶은데, 무슨 방법을 써도 볼 수 없어 막막하신가요?
그런 당신을 위한 상품이 당일 입고되었습니다.
"소원의 거울"

고담시 내로우즈 21번지 6, 「𝒶𝓃𝓉𝒾𝓆𝓊𝓊𝓈」

 

 

 딕은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이상한 광고 문자를 받았는데, 안에 적힌 내용이 딕의 결핍되어 있던 무언가를 순간적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운 사람, 너무나 보고싶은데 무슨 방법을 써도 볼 수 없는 사람.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차라리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자는 생각에 블러드헤이븐에서 새 둥지를 틀고 낮에는 경찰관으로, 밤에는 도시를 수호하는 자경단원으로 바깥 일에만 미친듯이 매진하던 그였다. 한동안은 고담에서 오는 연락도 모조리 거부했고, 심지어 고담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나마 망각의 축복 덕에 시간이 지나면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상실감도 점차 옅어지고 겨우 주변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타이밍에 이런 문자가 왔다. 딕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가게 위치가 블러드헤이븐도 아니고 저멀리 고담이다. 이사하면서 전화번호도 전부 바꿨으니까, 블러드헤이븐에 사는 딕에게까지 광고를 할 이유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딕의 사정을 아는 누군가의 소행처럼 보였다. 편집증적인 불안감이 닥쳐올라와 당장 컴퓨터를 켜서 문자가 온 경로를 역추적했는데 결과는 참 허무했다. 이 문자를 받은 사람은 딕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단체문자 프로그램을 이용해 수백 명에게 뿌려진 스팸성 문자였고, 그 중에 운없게도 딕의 서브 핸드폰 번호가 들어있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문자를 삭제해버렸다. 괜히 아침부터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오늘은 간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휴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쉴 틈없이 확인해야 할 게 많았다. 타이탄즈에서 온 메시지를 쭉 훑어보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채팅방 대화도 구경하고, 서에서 온 자료를 정리해 밀린 보고서까지 작성 후- 바바라가 이메일로 보내준 파일을 마지막으로 클릭했다.

 한 달 전부터 고담에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한, 레드후드에 관한 내용이었다. 고담의 파크 로우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대놓고 마약상을 처형시키고 배트맨과 몇 번 부딪히는 등, 몹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레드후드와 블러드헤이븐과는 크게 연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연찮게 블러드헤이븐에서 뻗어나간 마약 조직 활동이 고담까지 미쳐 고담에서 몇 번 만난 전적이 있었다. 조커를 생각나게 만드는 이름, 수상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라이더 헬멧, 그 아래의 두툼한 몸매.

 

'뭐야, 마지막은?' 딕은 고개를 휘휘 돌려 잡생각을 흐트려버렸다.

 

 다시 집중해서 내용을 읽어내렸다. 보고서 안에 첨부된, 레드후드가 찍힌 사진을 보던 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를 볼 때마다 낯선 기시감이 드는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왜 느껴지는 감각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레드후드는 배트맨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따돌리곤 했는데, 단순히 박쥐를 오랫동안 관찰해서 얻어낸 정보라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못한 점이 있었다. 혹은  단순히 몸매가 취향이다라는 간단한 이유는 절대 아닐거다. 원인을 알 수 없어 괜히 신경질이 났다. 얼른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 기시감을 해결하고 싶었다.

 딕은 노트북을 덮고 기지개를 폈다. 집에서 혼자 액정 화면을 노려보며 골똘히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쨌거나 할 일은 전부 끝냈다. 그리고 갑자기 몰려오는 무료함, 정적. 

 

'오랜만에 알프레드라도 보고 올까. 팀도 얼굴 보고 이야기한지 오래되었지.'

 

 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집사의 오후 티타임에 중도 참여가 가능할 것 같았다. 알프레드에게 오늘 찾아가겠다는 간단한 안부 연락을 보냈다. 어차피 집에 혼자 있어봤자 할 일 없이 사건 케이스나 뒤적거리고 있을 거 같으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을 집고 소지품을 챙긴 후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분명 처음에는 알프레드와 팀과 만나러 웨인저로 경로를 설정하고 운전하고 있었다. 블러드헤이븐에서 웨인저까지 가는 길은 항상 외우고 있어서 길을 잃을 수가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던 걸 깨달았다. 더 기가 막힌 건, 운전할 당시 경로를 바꿀 생각이 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로빈슨 공원을 지나서 내로우즈 어딘가에 위치한 이 이상하고 낡아빠진 골동품 가게 앞에 멈춰설 때까지 말이다. '그냥 오늘 좀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와 버렸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면 그만이건만, 발걸음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와버린거, 딕은 가게를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안티쿠스(antiguus)라는 이름에 아주 적합한 가게네."

 

 그곳은 주변 가게들과 굉장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내로우즈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스포일러나, 아니면 고담시 전역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는 바바라라면 이런 가게를 발견하고 어디선가 한 번 정도는 언급했을 거 같은데 그들에게서 이런 가게를 소개받은 기억같은 건 없었다.

 꼬불꼬불한 담쟁이 덩굴이 여기저기 부서진 가게 벽돌을 모조리 덮고 있었고, 십수년이 지나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아빠진 나무간판이 겨우 자리를 붙들고 있었다. 문 옆에는 화단이 있었는데, 다들 시들시들한 게 곧 죽을 거 같았다. 전면은 통유리였으나 이상하게도 가게 안이 너무나 어두워서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는 건, 창문에 비친 햇빛에 반사되어 홀로 반짝이는 저… 전신 거울뿐.

 전체적인 느낌은 약간 몹시 수상쩍은 가구점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골동품을 파는 가게이니 아예 틀린 설명은 아닌 거 같다. 찜찜한 부분도 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인 가게라도 되는 걸까. '고담에서 무인가게? 가게 주인이 간도 크군.' 딕은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거울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문자로 광고한 거울이 저건가?'

 

 딕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데 생각과 다르게 몸은 가게 앞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 거울을 본 순간,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광고 문자 내용이 상기되면서 강렬한 의지가 솟구쳐올랐다. 이성이 앞으로 나올 위험과 그에 대한 대비를 끝마치기도 전에, 손으로 문고리를 덥썩 잡고 문을 밀었다. 딸랑-하는 맑고 경쾌한 종소리가 들렸고, 등 뒤로 문이 서서히 닫혔다.

 안은 보기보다 넓고 깨끗했다. 골동품에 배어있는 오래된 나무와 철 냄새, 가게 한쪽에 피워놓은 아로마 향초의 향기가 한데 모여서 노스탤지어를 연상케하는 묘한 향을 풍겼다. 일단 무턱대고 가게로 들어오긴 했는데, 진짜 이상한 가게일까봐 조마조마하긴 했다. 혹시 몰라서 허리춤에 찬 호신용 곤봉에 손을 갖다대었다. 다행히 물건마다 가격표가 붙어있어 분명 물건을 파는 가게는 맞았다. 벽 한면에는 '골동품 비싸게 매입합니다' 라는 문구도 붙어 있고.

 그중에서 거울만이 홀로 햇볕을 받으며 다른 물건들보다 유독 빛나고 있었다. 아까 밖에서 확인했을 때는 못봤는데, 거울에 뭔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 내용을 확인하던 딕의 얼굴이 팍 굳었다. 포스터를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플라잉... 그레이슨즈."

 

 '이 포스터가 어째서 여기에?'  홍보지로 뿌린 거고, 골동품점에 소품으로 꾸며진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어째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광고 문자도 그렇고, 이 포스터도 그렇고 역시 이 모든 게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의심이 물씬 풍겼다. 그렇다면 이제 용건이 확실해졌다. 이곳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 다른 피해가 생기지 않게 막는 일이었다.

 

"그리운 사람을 보게 해준다더니, 보여주긴 했네." 

 

 딕은 포스터 속 부모님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포스터를 다른 곳에 조심히 내려두었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니 긴장한 기색이 가득한 젊은 청년이 거울에 비쳐보였다. 딕은 얼굴 각도를 돌려가며 거울을 살폈다. 감시카메라도 없고, GPS 추적기도 없고, 건드리면 폭발하는 스위치가 달린 것도 아니고. 거울 자체는 흠집없이, 특별히 주변 장식이 예쁘거나 하지도 않은, 그냥 까만색 페인트가 칠해진 직각 나무 프레임 거울이었다. 어디 마트에 가거나 그냥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도 구매할 수 있을 거 같은 흔해빠진 인테리어 거울.

 

 '여기가 골동품 가게가 아니라 어디 중고매장같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법도 했지만, 거울을 제외한 다른 상품은 골동품에 무지한 딕이 보더라도 분명 오랜 세월이 지나 특유의 앤틱함, 과거의 경험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물건들뿐이었다. 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거울에 딕이 아닌 다른 사람이 비쳤다. 작고 까만 어린아이의 실루엣이 비쳤다. 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거울을 보러 오셨나봐요."

"아, 네."

 

 거울에 비친 이상한 실루엣을 자세히 보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가게 주인인 듯한 남자가 딕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딕은 주춤거리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는 세계 최고의 무술가, 배트맨에게 훈련받고 온갖 범죄, 함정, 폭력에 대처할 수 있도록 길러진 자경단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딕은 주인이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아무리 거울에 신경쓰고 있었다고 해도, 그의 오감은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대비할 준비가 가득했다. 아무리 기척을 숨기고 다가와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역시 수상쩍은 곳이다. 딕은 티내지 않게 경계하며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인 또한 딕이 경계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넉살 좋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이번에 새로 들여온 물건의 품질을 집중해서 검사하느라 손님이 오신 줄도 몰랐네요. 거기다 워낙 귀한 것들이라 흠집나지 않게 살금살금 걷는 게 습관이 되어서, 본의아니게 손님을 놀라게 해버렸군요."

"아녜요. 그나저나, 이 거울이 혹시 그, 소원의 거울인가요?"

 

 딕이 손으로 거울을 가리키며 말하자, 주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물건을 알아봐서 신이 난 건지, 아니면 그냥 손님이 말을 걸어서 기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얼굴을 한 범죄자가 있었는지 머릿속으로 기억나는 지명수배자들을 떠올려봤지만 인상이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건 단순한 우연에 불과했던 걸까.

 

"문자를 보고 오셨군요! 네, 맞습니다. 동양에서 수입한 진짜 물건이지요."

 

 주인은 거울을 어떻게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고담까지 수입해서 가져오는 동안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지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뜨렸지만 여전히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골동품가게 주인의 탈을 쓴 조직범죄자인지 아닌지 확실히 하고 싶어 주인을 계속 관찰해나갔다.

 

"그래서 손님께서는 보고싶은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예컨데, 연인이라던가?"

 "예… 뭐…."

 

 연인이라는 단어에 딕이 눈을 굴렸다. 정확히 하자면 연인은 아니다. 뒤늦게 깨달은 감정이었고, 홀로 삼켜냈던 거니까. 가슴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상실감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상실이라는 거대한 포장지에 돌돌 말아 숨겨버렸지만 정확히 정의 할 수 없던 조각의 기척을 애써 무시했다. 딕이 애매하게 대답을 회피하니 사장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죠, 그렇죠. 저희 가게를 방문해주시는 분들은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죠.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저 거울은 얼마죠?"

 "가격, 가격 말이죠."

 

 주인은 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시선을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는, 대놓고 흘겨보는 느낌에 딕은 이걸 불쾌하다고 해야할지 어이없다고 해야할지 반응을 할 수가 없어 그냥 멋쩍게 웃었다. '내가 호구처럼 돈을 마구잡이로 낼 것 처럼 생겼나?' 딕이 난처해하거나 말거나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 경우에는… 음음 그런가…."

 "?"

 "알겠습니다. 가격은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거울이 정할 겁니다."

 "네? 뭐라고요?"

 "그럼 이만, 장사 끝났으니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주인은 그대로 딕을 바깥으로 내쫓아버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게 주인은 딕을 질질 밀어 가게 밖으로 내보냈다. 순식간에 가게 문에는 CLOSE 팻말이 붙었다. 가게 안은 거짓말같이 칠흑처럼 새까매졌다.

 

 "뭐야? 뭔데? 이봐요!"

 

 부지불식간에 가게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거울은 어떻게 되는건지 확답조차 듣지 못하고,  억울한 마음에 문을 쾅쾅 두드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뒤에서 누가 딕의 어깨를 잡는 바람에 당장의 불청객을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팀이었다.

 

"딕, 여기서 뭐해? 저택에 온다더니 안오고! 한참을 찾았네!"

"팀!?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방금 내가 여기서 거울을 샀는데…."

"여기서? 거울을? 무슨 소리야?"

"여기, 안티쿠스라는 이 골동품 가게에서…."

 

 딕의 뒤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뒤에는고담 골목 어귀에서 흔히 보이는 낙서가 지저분하게 그려진 벽만이 존재했다. 새빨간색으로 지저분하게 락커칠이 된 낙서에는 레드후드라고 적혀 있었다. 분명히 말하건데, 딕이 가게에서 시선을 뗀지 1분도 되지 않았다. 팀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 하고, 곧장 가게가 있던 방향으로 다시 얼굴을 돌렸다.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분명 거기에 존재했던 가게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가게를 제외하고 주변 풍경은 같았다.

 오로지 이상한 골동품 가게만이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졌다. 딕의 넋나간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팀이 한숨을 쉬고 옆에 서서 그를 부축했다.

 

 " 일단 저택으로 가면서 이야기하자. 딕, 여기까지 어떻게 온건지 기억해?"

 "당연히 오토바이를 타고 왔지."

 "오토바이…. 그렇다고 치자…. 알프레드가 데리러 왔어, 돌아가자."

 

 팀은 상처투성이가 된 딕의 발바닥을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딕이 오토바이를 타고 온 건 GPS 흔적이 남아있으니 확실했다. 다만 오토바이가 주차된 장소와 딕이 발견된 이곳의 거리가 1㎞ 이상 떨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을 겪은건지, 혹시 가족들이 모르는 사이에 빌런의 정신공격을 받은게 아닌지 검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몇 번이고 검사를 돌려봤지만, 모두  '이상없음'으로 귀결되었다. 혹시 딕이 발견된 그 장소에 차원의 뒤틀림 같은 징조가 존재했는지 확인했지만 그곳 또한 별 문제는 없었다. 딕과 관련된 물건들... 오토바이도 물론 평범했다. 딕이 핸드폰 광고때문에 이렇게 된 거 같다며 발신자 추적을 요청했지만 문제는 그가 받았다는 광고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삭제했다는 기록도, 수신받은 기록도, 통신국을 해킹해서 내역을 살펴봐도 모두 공백의 결과가 나왔다. 그냥 딕의 핸드폰에는 연락처가 저장된 사람들 외에 낯선 문자가 온 적이 없었다.

 오로지 딕 그레이슨 혼자 겪은 일들. 이게 도대체 뭘 뜻하는 건지 팀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마치 수수께끼같았다. 이 점은 곧 맨날 범죄자 추적하고 쓰러뜨리는 비슷한 레파토리를 처리하느라 매너리즘을 겪고 있던 팀의 호기심을 깨우기 충분했다.

 

 여러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에 빠져 있던 팀에게 딕이 발을 절뚝이며 다가왔다.

 

 "팀, 뭔가 찾아냈어?"

 "아니." 팀은 고개를 저었다. 팀의 시선이 딕의 발에 닿았다.

 "몸은 좀 괜찮아?"

 "물론이지. 발바닥에 생채기가 좀 난 거 뿐인걸."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딕 도련님. 자칫하면 발바닥이 찢겨나갈 뻔 했으니까요."

 "네, 네."

 

 딕은 팀과 알프레드, 그리고 통신으로 듣고 있던 바바라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되도록이면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바바라가 보여준, CCTV에 잡힌 제 모습이 얼마나 미치광이처럼 보였는지 깨달은 딕은 최대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은 배제하고 단조롭게 설명했다. 그래봤자 다들 눈치가 빠르니 딕이 누굴 그리워하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된건데, 신경쓰지 마. 내가 진짜 아직 잠이 덜 깼었나봐."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줘, 딕."

"그래, 고마워."

 

 딕은 씩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지금 딕에겐 지켜야 할 동생이, 가족이 있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을 겪고 다시끔 확실히 마음을 다잡았다.

 남은 시간에는 알프레드가 만든 디저트를 먹고 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돈독한 시간을 보냈다. 브루스가 자리에 없던 게 조금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만나면 또 말싸움이나 할 거 같아서 다행스럽기도 했다.

 

 가족들이 남은 고담을 뒤로하고, 블러드헤이븐으로 돌아왔다. 정말 오늘 이게 뭔 난리냐며 혼자 자조스러운 웃음을 짓고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던 딕은 저 멀리 익숙한 형체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안티쿠스, 연기처럼 사라졌던 골동품점에서 봤던 그 거울이, 단정히 포장된 채로 딕의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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