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자 단문
연성2025. 8. 31. 15:04피터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다. 성당에서 지내기 전- 약 15년 정도의 옛 기억이 없었고 경찰 데이터베이스에도 잡히지 않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새하얀 침대보에 크고 풍성한 하얀 깃털 하나가 놓여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온몸에 흉터가 가득했지만 매우 평범하다. 가끔씩 어깨죽지에서 이유모를 격렬한 환상통을 겪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어, 스트레스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린, 일상적인 증상을 가진 평범 그 자체다.
피터의 하루는 매우 평범하고,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당 청소를 하고, 미사를 드리고, 공부를 하고, 청소를 하고, 가끔 기도를 드리고, 청소를 하고, 기도를 하고, 청소를, 기도를....
가끔은 고해성사실 앞을 기웃거리다가 멈춘다. 모두가 떠난 기도실에 홀로 앉아 십자가를 올려다 보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가끔은 그 십자가를 부수고 싶다는 격한 충동도 들었다. 성당 앞에 쓰러져 있던 무연고자를 받아준 주임 신부님께 몹시 감사한 마음뿐이지만, 때로는 이딴 부질없는 육체를 무시하고 지나치시지, 그랬다면 아무 갈등도 없이 조용히 낯선 땅에서 잠들었을텐데 하는 덧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피터는 이따금씩 꿈을 꿨다. 자신의 몸, 손조차 잡아먹힌 새까만 칠흑 속에서 유일하게 새파랗게 빛나는 새 한마리와 마주치는 꿈이었다. 처음에는 그 새가 엄청 멀리 있었는데, 꿈을 꾸면 꿀수록 새와 가까워지는 듯 했다. 주변이 온통 까만데 어떻게 거리감이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파란 새가 아니라, 파란 눈동자 하나가 피터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눈동자가 그에게 속삭였다. "제이슨, 내 작은 날개."
제이슨이 '피터'의 원래 이름이었을까? 작은 날개라는 건, 애칭일까? 그렇담 그 파란 눈동자가 '큰 날개'라도 되는 걸까? 꿈이라 그리 큰 의미가 있진 않을거라 여기지만 번번히 꾸는 꿈이라 마냥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하고, 피터는 한 번 이름을 말해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갑자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터가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말하길 거부하는 것 처럼, 마치 목소리를 내면 수상한 파란 눈동자가 당장 이곳으로 찾아오기라도 할 것 처럼,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금지시킨 것 처럼. 결국 이름을 부르는 걸 포기하고 청소를 마저 마무리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땅먼지들을 쓸어모았다.
피터가 의탁하고 있는 성당은 고담이라는 도시 특성상 신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도시가 생겨났을 때부터 존재했던 곳이라 그런지 비밀과 살아남은 힘이 있었다. 주임 신부는 피터가 이곳에서 쓰러져 있던 것도, 발견 당시에 주변에 특이하리만치 하얀 깃털이 널려 있던 것도 모두 신의 뜻대로라면서 그를 거둬들였다. 그래, 깃털. 파란 눈동자는 그를 작은 날개라고 불렀다. 피터는 점점 거세지는 익숙한 환상통에 빗자루를 바닥에 내버려두고 근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 죽지가 이렇게도 아프다니, 내가 무슨 날개라도 달렸던 것 같잖아.' 피터는 몸을 움츠린 채 자조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을텐데. 무슨 몸이 이렇게 고통의 역치가 높은지 어지간한 고통에도 정신은 번쩍 들었다. 피터는 그렇게 한동안 홀로 몸부림치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피터가 앉아 있던 의자 밑에는 새하얀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문제, 고담에서 심부름을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다음 항목에서 선택해보세요.
1. 슈퍼마켓에서 도둑으로 의심받기
2. 은행강도에서 붙잡히기
3. 경찰한테 불심검문 당해서 신분증 요청받기
4. 깡패한테 걸려서 가진 거 다 내놓으라고 협박당하기
5. 성당으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는 수상한 사람 만나기
정답은 전부 다 입니다!
오늘은 피터에게 운이 지지리도 없는 날이었다. 주방에 식료품이 좀 비었길래 재고를 채우려고 장보기 리스트를 적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하필이면 피터가 좋아하는 음료는 품절이었고, 기껏 집어든 파스타 면은 면발이 다 부러져 있어서 다른 브랜드로 구매해야 했다. 그래도 아이스크림 하나는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겨우 살 목록을 다 채우고 계산대로 향했는데 느닷없이 주머니에 뭘 더 챙기지 않았냐고 의심을 받았다. 여긴 피터가 자주 가는 단골 슈퍼마켓이었는데도! 결국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돈이랑 장바구니만 가져왔다는 걸 몇 번이고 확인받고 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피터는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후줄근한 행인이 오면 그럴 수 있겠지, 뭐.
그래,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행인이니까 이런 일도 살면서 몇 번 당하는 거다. 피터는 강도한테 붙잡힌 채로 태연하게 생각했다. 성당으로 돌아가기 위해 때마침 옆에 있던 은행을 지나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얼굴에 까만 복면을 뒤집어 쓴 강도가 나타나 피터를 붙잡고, 그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총구를 들이댄 채 당장 저 보따리에 돈을 채워놓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시전했다. 사람들의 비명이 난무하고, 여러 서류가 흩날리는 난리통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피터는 쇼핑백에 든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이 바로 나타나 인명피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실질적으로 다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한테 대충 인사하고 서둘러 성당으로 향했는데, 근처에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인지 신호등 신호를 기다리던 피터에게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청했다. 제길, 피터는 사회보장번호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런 게 어딨겠어? 있었으면 당장 성당에서 나와서 번듯한 집 하나 구해서 거기서 살았겠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신부님이 보증을 서줘서 큰 일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그의 신분을 보증할 사람이 없다. 검문을 당할 줄 몰라서 신부님이 보증해준 서류도 갖고 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녹아가고, 이대로 경찰차에 타서 서로 연행되려나 걱정하던 와중 이전에 성당에 자주 오던 경찰이 와서 귀뜸을 해줘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로빈슨 공원에서 성당으로 가는 길이 대략 2가지 있다. 첫번째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길로 나가는 건데, 대신 15분정도 빙 돌아서 간다. 두번째는 인적길이 드문 골목길을 통과하는 방법이고, 5분여 정도 소요된다. 여태까지 골목길로 가서 일이 생긴 적이 없어서 이번에도 과감히 골목길로 갔는데, 여태까지 없었던 일이 바로 오늘 터졌다.
장바구니는 바닥에 나뒹굴고, 피터는 거센 힘에 밀려 벽에 그대로 부딪혔다. 생각보다 이 몸은 형편없었다. 흉이 많아서 전생에 무슨 마피아나 조직폭력배였을 줄 알았는데, 그냥 지금처럼 누구한테 얻어맞고 다닌 듯 싶었다. 머리를 잘못 맞았는지 눈 앞이 흐려졌다. 점점 주변이 새까매지는 걸 보면 이대로 죽어가는 것 같았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깐 기절했었나보다. 눈을 뜨니 깡패들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이 피터의 눈 앞에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지나가다가 당신이 쓰러져 있길래 걱정되서 왔어요."
"아, 음, 네...."
아까 벽에 세게 부딪혀서 뼈 어딘가는 부러졌을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리에서 일어나니 몸이 멀쩡했다. 급하게 주머니에서 낡은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슈퍼마켓에서 나온지 20분이 지나 있었다. 진짜 잠깐 기절했다는 소린데 설마 그새 몸이 다 나은 건 아닐테고, 그냥 몸이 갑작스런 충격에 놀랐던 걸까? 피터는 고개를 갸읏거리며 이내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주어담았다. 남자는 피터가 하는 걸 물끄러니 보다가 제 발치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집어들고 장바구니에 마저 넣었다.
"고, 고맙습니다..."
"아니예요. 크게 다친 부분은 없으신 거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남자는 잘생긴 얼굴을 한껏 이용해 미소를 지었고, 피터는 화사한 미소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눈이 저렇게 파란 사람은 처음 봤다. 피터가 살면서 바다라고 하면 고담만의 회색빛 물결을 말하는 거였는데, 흔히들 말하는 푸른 바다가 바로 저 사람 눈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성당을 가려는데, 낯선 남자가 피터의 팔을 붙잡았다. 살짝 잡은 거 같은데 남자의 팔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저기, 갑자기 이런 질문 이상하지만요. ...고담성당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피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 앞이 바로 성당이었다. 하다못해 지금 바로 고개를 돌리면 햇빛에 반사되서 더욱 반짝거리는, 성화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보였다. 지금 이걸 질문이라고 묻는 건가? 더군다나 이 골목까지 들어왔으면서. 제아무리 피터가 기절해있었다 한들, 구석진 골목길 중간에 쓰러진 피터가 보일 리는 만무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해가 안갔지만 최대한 의심을 억눌렀다. 고담을, 고담 성당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모를 수도 있을 테니 최대한 친절하게 답변했다.
"이 골목길을 나가시면 바로 고담 성당이예요."
"아, 고맙습니다."
피터가 먼저 앞장서서 장바구니를 들고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몸의 피로가 남아있던 모양인지 아까 붙잡힌 팔부분이 욱씬거렸다. 그러다 가는 길이 같으니 그 사람도 뒤에 있으려니 싶었는데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그 남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골목을 나오자마자 뒤를 돌아본거니 남자가 바로 뒤에 있어야 했는데, 없었다. 반대편으로 돌아갔다기에는 피터가 걸어온 시간이 채 3분이 넘지 않았다. 양 옆으로 트인 길이니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을 수도 있지만... 불안한 마음에 피터는 잽싸게 성호를 그었다.
악마가 점찍은 존재는 불행해진다. 어딘가에서 그런 글귀를 읽었다. 부엌에 도착해 장바구니에서 물건을 정리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악마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려서 그 죄를 받고 지상으로 추락한 천사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말했던 것도 같다. 피터는 바구니에서 마지막으로 남자가 주워줬던 아이스크림을 집어들었다. 물처럼 흐물흐물 녹은 아이스크림을 물끄러미 보다가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무언가 그림같은 게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브루스'의 눈을 피해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이라 말하던 그.
불현듯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새파랗게 빛나던 파란색을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꿈 속에서 '제이슨'이라 부르며 저를 찾던 이와 똑같았다. 갑자기 주방 전기가 깜박거리더니 파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나가버렸다. 부지불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또다시 어깨죽지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또 만났네, 제이슨."
꿈 속에서 만났던 것 처럼, 제이슨은 고개를 들어 불이 꺼진 복도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딕 그레이슨을 마주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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